2013년 12월 18일
언니네 채널[넷] 특집 122호 ‘동성결혼 피로연疲勞宴’
작성자: 나기
지난 4월 17일 뉴질랜드의 국회에서 ‘결혼 (정의) 수정 법안’ [Marriage (Definition of marriage) Amendment Bill]이 통과되던 순간, 그 결과를 보기 위해 국회의사당 2층에 몰려있던 시민들에게서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Pokarekare ana Nga wai o Waiapou
로토투아의 호수에는 폭풍이 불고 있지만
Whiti atu koe E hine Marino ana e
그대가 건너갈 때면 그 바다는 잠잠해질 겁니다.
E hine e Hoki mai ra
그대여 내게로 다시 돌아오세요.
Ka mate ahau i Te aroha e
너무나도 그대를 사랑하고 있어요.
Tuhituhi taku reta Tuku atu taku ringi
그대에게 편지를 써서 반지와 함께 보냈어요.
Kia kite to iwi Raruraru ana e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말예요.
E hine e Hoki mai ra
그대여 내게로 다시 돌아오세요.
Ka mate ahau i Te aroha e
너무나도 그대를 사랑하고 있어요.
<포카레카레 아나>는 로토투아 호수를 사이에 둔 적대적인 두 부족 출신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발각되어 한 사람은 처형될 위기에 처하고 한 사람은 카누가 불태워져 그를 구하러 갈 수 없게 되자, 호수를 헤엄쳐 건너 연인을 구하고 부족 간의 사이를 회복시켰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민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 노래인 것이죠. 1986년 16세 이상 남성이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처벌한 법을 없앤 이후로 1993년 여성끼리의 성적 관계 처벌 규정 삭제, 2005년 시민결합(civil union)법을 제정한 뉴질랜드. ‘결혼 (정의) 수정 법안’이 통과되며 국회의사당을 가득 채운 노래는 단순한 기쁨이라기보다는 그 지난한 싸움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 같았습니다.
뉴질랜드 보수당인 국민당의 모리스 윌리암스 의원은 법안이 통과된 3차 독회에서 이런 지지 발언을 했습니다.
“이 법안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그 사랑을 결혼이라는 것으로 인정받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외국에 핵전쟁을 선포하자는 것도 우리 농작물을 해하는 바이러스를 들여오자는 것도 아닙니다. […] 이 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태양은 내일도 떠오를 겁니다. […] 세상은 똑같이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법을 적용받을 이에겐 정말 환상적이겠지만 나머지에겐, 그저 삶이 계속 흘러갈 것입니다.”
LGBT 국회의원이 존재할 뿐 아니라 LGBT 인권을 지지하는 ‘보수’ 측 국회의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부러운 일입니다. 동성애 처벌 규정인 군형법 제92조의 6 조항을 폐지하기는커녕 개악 법안 발의를 막아야하고, 국회에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었다가도 혐오세력의 극렬한 반대에 의해 철회되고 마는 한국사회를 생각했을 때, 사회구성원의 다양성과 인권에 대한 인식수준이나 ‘동성결혼’이 이야기되는 환경이 정말 다르구나- 라고 깨닫게 됩니다. 서울대학교성소수자동아리 큐이즈(QIS)에서 낸 성명과 같이 한국사회는 성소수자가 여전히 “우리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인간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해야 할 만큼 척박한 환경이니까요. 동성결혼이라는 의제를 통해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함께 살 수 있을 것인가를 풍성하게 논의하기에는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사회구성원으로 인식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이 뼈아픕니다.
하지만 뉴질랜드 국회의원의 지지발언도 그런 지지발언을 할 수 있는 보수 측 사람이 국회에 있다는 존재의 의의를 넘어서 내용을 곱씹어 보면 멈칫하게 됩니다.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법은 정말 ‘사랑’을 인정하는 법인 것일까요? 세금이나 재산권, 입양과 같은 권리들을 결국에는 ‘결혼’에 대한 정의를 수정함으로써야 이성애 커플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 걸까요? 왜 동성결혼이 인정되고 나서도 나머지 사람들의 세상은 이전과 ‘똑같이’ 흘러가는 걸까요?
언니네트워크, 비혼, 가족다양성
멀리 동성결혼 제도화 과정을 보며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는 건 언니네트워크 비혼 운동의 맥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언니네트워크는 2005년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개편이 될 때 <다양한 삶의 형태를 선택할 권리, 여성이 가족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행복할 권리를 위해 여성가족부에 반대합니다!>라는 릴레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2006년 ‘정상가족’의 바깥에서 다른 가족이나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가는 혹은 가족을 구성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비혼 여성 차별에 대한 저항’을 단체의 주요 운동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언니네트워크에서 비혼은 단지 결혼하는 삶과 결혼하지 않는 삶이라는 ‘동등한’ 이항구조 가운데서의 개인적인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 사이에 위계가 있음을 비판하는 정치로서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비혼은 1) 결혼·출산으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것이 이성애 관계를 전제함으로써 이분법적인 성별 관계를 강화하고, 여성이 언제나 남성과의 관계맺음 속에서 ‘정상성’, ‘여성됨’을 인정받게 된다는 이성애중심주의 비판, 2) 여성의 위치를 ‘가족’이라는 틀 안으로 한정짓고 ‘어머니’, ‘아내’, ‘딸’ 이외의 정체성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시민’의 권리에서 여성이 제외된다는 비판을 핵심적인 문제의식으로 가져왔습니다.
비혼으로서 결혼/가족 담론에 개입한다는 것은 비혼의 영역을 할당받는 형태가 아니라 이렇듯 ‘나머지 사람들의 세상’이 누구를 어떻게 배제하면서 자신의 정상성을 획득해왔는지를 질문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죠. 기존의 결혼/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생애주기에서 벗어난 삶의 모델을 계속해서 발굴하며 가족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해온 언니네트워크의 운동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른 위치에서
지난 9월 청계천에서 열렸던 김승환-김조광수 커플의 동성결혼식을 전후로 한국사회에서도 동성결혼에 대한 논의들이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어떤 위치에서 어떤 질문을 가지고 시민권과 관계,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성애 중심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에 이성결혼이 아닌 동성결혼에는 지지를 할 수 있다거나 결국에는 혼(婚)을 매개로 권리를 얻겠다는 것이므로 동성결혼도 결혼이라는 측면에서 반대할 수 있다는 등, 지지냐 반대냐의 단순한 위치로 환원되지 않기 위해서 동성결혼에 대해 고민해보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채널넷 특집은 ‘동성결혼’이라는 주제로 꾸려보았습니다.
몽은 평등권이나 제도의 보호와 분배를 동등하게 받을 권리로서의 동성결혼 논의 속에서, 여성의 시민권과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여성주의 이슈로서 동성결혼에 대한 고민을 썼습니다. 나기와 난새는 동성결혼이라는 주제를 놓고 다양한 연차의 비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커플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았습니다. 무다는 동성결혼을 제도화하는 법 제·개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에서 나온 동성결혼 이슈 이면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케이는 미래에 퀴어이자 비혼으로서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그림을 통해 언니네트워크 20대 회원들과 함께 그 미래를 상상해보았습니다.
동성결혼을 둘러싼 논의들이 ‘다름이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 보다 다양한 이들의 권리와 관계가 보장되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려면 각자의 차이를 뭉뚱그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해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 아주- 오랜만에 여전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채널넷을 열어봅니다!
작성자: 몽
“결혼은 사랑, 헌신, 그리고 가족에 관한 것이다”
– ‘결혼할 자유’(Freedom to Marry) 캠페인 1)
결혼제도 개방을 위한 미국의 ‘결혼할 자유’ 캠페인 영상을 보다가 새삼스러운 고민이 들었다. ‘결혼이 진정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가족의 규범에 결혼을 결부시키는 방식이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한 ‘전략’으로서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올해 한국에서 김승환.김조광수 동성결혼식을 계기로 한 일련의 토론회들이 ‘동성결합’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왜 ‘동성결혼’이 아니라‘동성결합’이었을까?
여기에서 ‘동성결합’은 법적.제도적 차원에서의 동성결혼, 파트너십, 시민결합의 형태와 동성파트너 간의 동거를 모두 포괄하면서도 동성파트너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2) 이는 친밀성에 대한 욕구를 포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동성애자 커플과 같은 성소수자의 가족구성권을 포함해 기존의 특권적인 가족제도 밖에 위치한 다양한 주체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어떻게 인정하고 사회적 보장 체계를 만들 것인가를 중심으로 진행된‘가족을 구성할 권리’ 논의의 흐름 속에서 선택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성결혼’과 ‘동성결합’ 중 어떤 언어를 선택해서 말하는가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질 것 같다는 한 성소수자의 이야기는,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운동의 합의된 목표, 전략에 대한 판단이 모호한 현재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혹은 그 ‘합의된 전략’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긴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가 단 두 가지인 것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혼을 통해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과 ‘결혼 외에도’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다르다. 이는 각기 다른 목표와 방법론을 동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definition) 혹은 ‘가족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규범(norm)에 대해서도 다른 재구조화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으로는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개인-시민’이라는 지위에 대한 사회적 승인 조건과 연결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가족 다양성’을 지지한다는 것
그동안 기존의 결혼·가족제도가 갖는 문제에 대한 비판과 제도 바깥 주체들의 권리에 대한 대안은 주로 ‘가족 다양성’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지만, 이에 대해 여성학자 이박혜경은 “기존 가족에 문제가 많다면 결국 다양한 가족 주장은 그저 다른 가족이 아니라 더 나은 가족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3) 이는‘더 우월한’ 가족의 형태나 내용을 판가름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있다는 의미라기보다, ‘다르다’는 말로 필연적으로 정치적이고 논쟁적일 수밖에 입장들의 차이들을 지운 채 상대주의로 안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가깝다. 나는 기본적으로 ‘결혼 외에도’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4) 그리고 때로는 특정한 (결혼과 가족이 동의어로 기능하는) 차원에서는 ‘결혼할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 주체가 될 권리, 그래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사회 정의(justice)로서 우리가 지향하는 ‘가족 다양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 형태’가 실제로 다양했고, 다양하며, 더 다양해지고 있다는 사실(한부모 가족, 입양 가족, 비혼, 만혼, 1인 가구, 노인 단독 가구, 공동체 가족, 이성애자/동성애자 동거, 한부모, 입양 가족, 다문화 가족, 이주노동자 가족, 장애/청년 공동생활가족, 자립생활공동체 등),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 다양하게 변화한다는 분석은 물론 중요하다. 이미‘가족’의 전제를 다시 사고하게 할 만큼 중요한 변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족 다양성’ 논의에서 가족 형태의 다양화와 그 변화가 가져오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족 다양성’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얼핏 오래되어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혹은 모두에게‘너무 당연해서 수용 가능한’ 지향으로, 이미 합의된 개념으로 전제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 담론에 가장 주요하게 개입해왔던 여성주의 진영에서도 ‘가족 다양성’은 첨예한 정치로 다루어지거나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는데, 이는 정치적 차이의 가시화, 권력관계의 역동을 전제로 하는 ‘가족 다양성’(family diversity)이 ‘다양한 가족의 등장’이라는 현상과 가족형태의 열거로 그치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산층·이성애·비장애·단일인종/민족중심성 등 결혼·가족제도가 갖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특권적 지위의 영향력을 비가시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여성주의 정치학자 Bacchi는 ‘다양성’이라는 용어가 문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긴급하게 성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다양성’(diversity) 혹은‘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용어가 사회적 종속의 교차 과정(cross-cutting processes)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은 언어이자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성, 흑인, 장애인, 동성애자 등 ‘주류’에서 배제된 것으로 인식되는 집단 모두를 그저 기술하는 약어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5)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을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부정의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녀의 지적은 관습적으로 다양성을 이야기해왔던 내 자신의 운동을 돌아보게 한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가족 다양성’ 담론에 대한 논의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가족구성에 대한 소수자 집단의 욕구가 단일하지 않고 ‘결혼할 자유’라는 평등권 요구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혹은 그래야 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위한 정치를 환기하지 않고서는 기존의 결혼-가족제도에 긴장을 제기하는 소수자 집단의 위치와 경험은 ‘그들/만의 문제’로 분절되고 협소화되기 쉽다.
‘가족 다양성’의 정치성과 ‘개인’의 등장
여성학자 정희진은 남성은 국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거나 국가 그 자체가 남성이고 그래서 남성의 시민권은 가족 제도와 관련이 없지만, 여성이 공적 영역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가족 제도를 통해 남성을 매개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없는 여자들-레즈비언, 비혼 여성, 이혼 여성 등- 혹은 남성에게 선택되기 어려운여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시민권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6) 이러한 측면에서 이전의 (성)소수자-여성 및 시민사회 운동이 ‘가족 다양성’을 주장하며 기존의 가족을 상대화, 변화시키기 위해 개입한 지점은 바로 결혼·가족제도의 이성애 중심주의 비판과 함께 개인으로서 시민권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결혼.가족.이성애가 여성의 정상성을 규범 짓는 핵심기제라고 비판, 가족 및 결혼에 대한 통념들이 위계와 강압에 근거한 제도임을 주장함으로써 1990년대 중후반에 ‘성의 정치’(Politics of Sexuality)를 본격화한 ‘영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 그룹의 등장, 7) 여성이 가족과 맺는 위치와 섹슈얼리티에 따라 가시화된 여성 내부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급성장시키며 소수자 여성들의 시민권 부재, 여성 성소수자와 장애여성이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인정되는 삶에 대한 요구를 가시화한 <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 8)와 같은 활동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가족형태에 대한 차별과 함께 다양한 가족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는데, 이는 2005년 호주제 폐지를 전후로 어떠한 신분등록제를 대안으로 마련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진보정당의 등장 및 시민사회운동의 움직임과도 연관된다. 2003년 <일인일적 실현 공동연대>, 2004년 <개인별신분등록제 실현을위한공동연대>, 이후 전환된 2005년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는 가족 안에 고립된 개인을 가시화함과 동시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고 공식화하는 방법에 대해 논쟁해왔다.
하지만 가족제도에서 가족 다양성이 가장 논쟁적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호주제 폐지 움직임과 맞물린 2004년 『건강가정지원법』 제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이’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가족’ 담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문제설정이 국가 주도의 여성.가족정책 및 일부 여성운동 주체들에 의해 이성애.핵가족제도의 다양성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로서 본격적으로 전유되기 시작한 것도 이를 기점으로 한다. 그리고 가족 다양성 주장을 탈정치화하는 움직임에 대한 비판 역시 함께 제기되는 복잡한 양상을 띤다. 9)
여성주의/운동 진영은 『건강가정지원법』의 명칭 자체가 ‘건강’을 기준으로 ‘비건강/비정상’ 가족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비판적 입장을 공유하지만, 그 비판의 핵심이 무엇인가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그것은 바로 (‘어떤’ 위치에서) ‘가족을 무엇으로 정의하는가’이다.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가족연구모임은 “모든 국민은 그가 결혼했든 결혼하지 않았든, 가족과 함께 살고 있든 혼자 살고 있든, 혹은 다른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고 있든 간에 사회보장제도 및 기타 정책의 수혜를 동등하게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며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통해 『건강가정지원법』 의 명칭과 「가족 및 가정」의 정의를 중립적으로 수정하고 법률을 정비하라는 권고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10) 이와 함께 ‘여성의 시민권’, ‘가족구성에관한 권리’라는 목소리가 가시적으로 등장하고, 11) 여성주의 내부의 이성애·중산층 중심적 가족주의에 비판, 가족 개념의 해체적 재구성을 요청하는 움직임과 함께 12) ‘신가족주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은 거의 사화적으로 쟁점이 되지 못했고, 가족이 혼인.혈연.입양에 기초한 단위라는 중심 전제 역시 쉽게 변화하지 않았다.
특히 제도, 정책에서 ‘다양한 가족들’이 기존 가족제도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 관용성을 보여주는 유사물로 논의되어온 배경 속에서, “왜 (여성이) ‘개인’이 아닌 ‘가족구성원’인가?”라는 의문과 비판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13) 가족을 경유하거나 ‘부계남성과의 관계맺음’ 없이도 여성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위치 지어져야 한다는 것, ‘시민됨’에 대한 사회적 인식 및 인정 체계에 대한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리고 이는 ‘사회의 최소 기본 단위는 (커플에 기반한) 가족’이라는 전제, 따라서 개인/시민이 아닌 가족을 기본단위로 수립되는 복지·가족정책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족이 무엇인가’ 정의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개인/시민’ 정체성 및 지위를 어떤 기준으로 승인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다.
“근대에 들어와 승리를 거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가족이다.”
– 필립 아리에스 (Philippe Ariès) 14)
동성결혼과 ‘가족 다양성’
나는 김승환.김조광수의 동성결혼식이 단지 ‘결혼’이라는 기존의 억압적인 결혼제도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문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즉각적으로 이성애적 젠더, 결혼 규범을 ‘답습’하는 것이라거나 ‘비이성애의 정상화(normalization)’라고 단정,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사랑하니까 결혼한다’,‘로맨틱’, ‘당연한 결혼식’이라는 명명은 분명히 여러 가지 차원에서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한국사회에서 결혼-가족을 정상화하는 친밀성의 규범으로서 비판되기 이전에 혹은 동시에, ‘동성애자의 사랑’이 담론화 되어 온 지형 역시 (정말로) 충분히 지적, 비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자 김순남은 사랑이 정체성과 관계없는 삶의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인식’되지만(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성애규범적인 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존재는 동성애 혐오를 통해 독립적인 사랑의 주체, 관계의 주체에서 배제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15)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에게 ‘사랑’은 개인적인 취향이나 본능 vs 선택의 이분법 차원이 아니라, 이러한 조건과 맥락 속에서 ‘정치적인 것’으로서 의미화 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의 “이성애 커플과 다르지 않다”는 발화 역시, (‘동화주의’로 의미화되기 보다) ‘각본 없는 삶’이라는 차원에서 결혼-가족제도로 묶이기 이전의 관계 혹은 묶이지 않는 관계가 너무 쉽게 ‘불안정하고 임시적’ 시간이자 ‘가족이 아닌’ 관계로 수렴된다는 조건과 함께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무엇을 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인 담론을 재구조화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동성결혼에 관한 논평 중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바로 동성애 혐오 세력의 동성결혼 반대 주장은 ‘이성애자들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가족연구자 스테파니 쿤츠의 논평이다. 16) 그녀는 동성애자들이 결혼할 권리를 주장해서 사회적으로 ‘신성한 결혼’이 위협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성적 관계나 자녀 양육을 위한 대안적인 삶의 방식들을 많이 만들어내서 남녀 간의 엄격한 분업을 바탕으로 한 ‘가족’의 우월적 지위를 무너뜨린 것은 바로 이성애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성애자들의 이혼, 한부모 가정의 등장, 동거의 증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신자들의 존재가 결혼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데 기여했고, 동성결혼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이처럼 (결혼제도가 끊임없이 유연화를 통해 소생해 온) ‘이성 결혼의 혁명적인 변화가 낳은 불가피한 결과’라고 역설한다. 나는 동성결혼/결합을 제도적으로 요구하는 동성애자들을 ‘문제의 원인’이나 ‘위기’ 혹은 ‘혼란’으로 정의하고 유포하는 사회적 담론에 맞서, 기존에 무엇이 문제였는가에 대한 인과 담론을 재설정하고 당연시되는 전제에 도전하는 활동들이 훨씬 더 풍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소수자에 대한 격렬한 혐오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그에 개입하는 것이 언니네트워크 여성주의 정치의 역할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만큼, ‘동성결혼은 이성결혼과 다르다’라는 말 속에서 기대 외에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등장하지 않는 것 역시 부족하다. 물론 ‘결혼할 권리’는 그동안 이성애자만 누릴 수 있는 권리로서 성소수자가 배제되어 왔다는 점에서 성소수자의 ‘평등한 기회’라는 측면에서 차별이다. 그리고 김승환.김조광수 두 사람의 결혼은 이러한 관점에서 ‘결혼’에 부착된 이성애 중심주의 해체를 전망하면서 다른 가족구성의 권리과 자유를 공적으로 제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특혜’, ‘수혜’라고 지칭하는 언론은 마치 동성애자의 가족구성권을 특별하고 추가적인 권리로 인식되도록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기능한다.) 호주제 폐지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던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헌법의 제일 가치인 개개인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의 측면에서 동성결혼 제도화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하기도 한다.
“…가족제도나 가족법이 헌법의 우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없다. … 가족법의 역할은 사회현상이나 국민의 법감정을 단순히 반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최고가치질서인 헌법이념을 적극적으로 계도하고 확산시키는 역할 또한 가족법의 몫이다.” 17)
하지만 ‘동성결합’ 제도화가 어떤 방향으로, 어떤 전략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가가 ‘가족 다양성’의 정치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담아낼 것인가와 분리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시민/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의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이성결합이든 동성결합이든 ‘개인/시민’과 ‘가족’은 커플인 ‘부부’와 ‘결혼’을 벗어나서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가정, 가족 다양성은 이미 규범이다. 동성결혼 권리를 위한 투쟁은 다양한 가정 및 가족들의 보장성(security)과 안정성(stability)을 강화하기 위한 보다 더 큰 노력의 한 부분이다. … 안정성과 경제적 보장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모든 가족들, 관계들, 가구들은 법적 . 경제적인 인정의 기본적인 형태를 결혼과 부부 관계라는 필요요건에서 분리하는 것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이다.” 18)
2006년 미국의 LGBT & 퀴어를 비롯한 연구자 및 활동가들은 ‘동성결혼을 넘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LGBT 인권운동에 새로운 전략적 비전이 필요한 이유를 역설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 다양성’이 이미 규범이 되었다고 선언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결혼의 합법적 지위를 신성화하는 동시에, 부부와 핵가족을 친족 관계의 기본 형태로 물화한다”는 점에서 ‘동성결혼’ 제도화 운동을 사회정의의 기획으로서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 선언에 이름을 올린) 웬디 브라운의 입장에 동의한다.
나는 “모든 국민은 그가 결혼했든 결혼하지 않았든, 가족과 함께 살고 있든 혼자 살고 있든, 혹은 다른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고 있든 간에 사회보장제도 및 기타 정책의 수혜를 동등하게 받을 권리”를 주장했던 2004년의 여성주의자들의 문장을 떠올리며, 동성결혼을 이슈화하는 과정이 기존의 ‘기회’, 평등을 다른 차원에서 사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정치학자인 아이리스 영은 권리나 ‘기회’(opportunity)라는 개념을 ‘정의의 분배’의 문제로만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는, 구체적인 맥락에 놓인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의 차원에서 사고할 것을 주장한다. 권리나 기회 등 정의의 문제는 분배로만 설명될 될 수 없으며, 개인이 스스로를 개념화하는 것을 포함해 사람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동성결혼은 분명 동성애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차별받았으며 어떠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인지를 가시화 할 수 있는 계기이다. 하지만 그것이 부부와 결혼을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 권리를 동성애자로서 요구하는 방식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에 절실하고 필수적인 민주주의로서의 복지를 ‘결혼을 통한 가족’으로 정의에서 요청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구성에 자기 자신, 다른 개인 혹은 집단이 놓인 위치와 경계를 의문시하고 도전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 다양성’에 대한 지향은 특정한 형태의 가족을 특권화하고 여타 다른 가족의 형태를 위계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없이 불가능하고, 실제로 동성애자의 삶과 차별, 권리는 그 관계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결혼-가족의 연관성을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인식을 상대화 할 수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차별을 구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와 ‘권리’가 필요하다. ‘더 나은 가족’을 꿈꿀 수 있는 그런 기회와 권리가.
[주석 | 참고자료] 1) Freedom to Marry, 2011, “Freedom to Marry’s Roadmap to Victory” 캠페인 영상 중 : 미국에서 2003년 Evan Wolfson에 의해 시작된 “전국적으로 결혼을 쟁취하기(win) 위한 캠페인”으로, 미국의 ‘결혼보호법’(‘Defense of Marriage Act’, DOMA) 위헌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보러가기]2) 한가람, “동성결합의 실천과 <당연한 결혼식>의 의미”, 가족구성권 연구모임 2013년 연속기획 두 번째 워크숍 <동성결합의 실천과 <당연한 결혼식>의 의미>, 가족구성권 연구모임, 2013년 9월 4일, p. 2)
3) (이)박혜경, 2001, “가족 대안의 모색”, 『경제와 사회』, 여름호(통권 제50호), pp. 116)
4) 김조광수는 동성결혼을 사회적으로 의제화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동성결합의 형태, 가족제도에 비판적이거나 가족제도로부터 배제된 주체들의 가족구성권을 함께 포괄해서 논의하고 싶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 규환,석, ““I DO!” 평등한 결혼을 꿈꾸는 김조광수의 결혼 이야기“,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2013년 8월 소식지 중, 2013년 8월 12일 자 [보러가기]
5) Carol Bacchi, “성 주류화와 적극적 조치, 그리고 다양성 : 성 평등 정책의 정치와 의미”, 『성 주류화의 이론과 실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제 학술심포지엄, 2009년 9월 17일, p. 160)
6) 정희진, “군사주의와 남성성 – 한국 ‘평화’운동의 남성연대 비판을 위한 시론”, <세계화 시대, 한국여성주의의 발전과 과제>, 한국여성학회 광복 60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 2005년 10월 14일, p. 246)
7) 노미선, 2008, 『고학력 30대 비혼여성의 성별/나이의 위치성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석사학위논문, p. 31~36)
8) 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 “3.8 여성무지개시위 2004 – WOW! 또다른 세상을 공감하며”, 2004년 2월 28일 자
9) 여성학자 이재경은 이를 ‘정상가족을 기준으로 한 변이(variant) 현상으로 보는 관점’으로서 비판한다.
10)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정책위원회) 결정 “건강가정기본법에 대한 권고”, 2005년 10월 10일
11) 조주은, “이제 ‘가족구성 권리’로!”, 여성주의 저널 일다, 2004년 5월 9일 자 [보러가기]
12) 여성학 가족관련 연구자와 소모임, 여성주의 웹진 언니네, <건강가정기본법 대안을 위한 난상 토론회>, 2004년 7월 17일
13) “어머니/아내/딸에서 겨우 ‘개인(시민)’이 되었는데, 왜 갑자기 다시 ‘가족구성원’이 되어야 하나?” : 시타, “심란하다, ‘여성가족부’”, 언니네트워크 2번째 감자모임 <심란하다, “여성가족부”>, 2005년 2월 23일
14) 배경내, “국제인권기준이 말하는 ‘가족’과 한계”, 전국인권활동가대회 준비모임이 주최하는 연중기획 반차별 포럼 3 <가족과 차별>, 2004년 6월 10일, 발제문 중 재인용
15) 김순남, 2013, “이성애 결혼/가족 규범을 해체/(재)구성하는 동성애 친밀성 : 사회적 배제와 ‘독립적’ 삶의 모델 사이에서”, 『한국여성학』, 제29권 1호, pp. 102~103)
16) 스테파니 쿤츠 지음, 김승욱 옮김, 2009, 『진화하는 결혼』, 작가정신, p. 471)
17) 양현아, “호주제도 폐지라는 역사 읽기”, <세계화시대 한국여성주의의 발전과 과제>, 한국여성학회 광복60년기념 종합학술대회의, 2005년 10월 14일, p. 74~75)
18) <동성결혼을 넘어서 : 우리의 모든 가족들과 관계들을 위한 새로운 전략적 비전>(Beyond Same-Sex Marriage: A New Strategic Vision For All Our Families and Relationships), 2006년 7월 26일 자 : 2006년 4월, 20여명의 LGBT & 퀴어 활동가들(단체 활동가, 연구자, 교육자, 모금가, 작가, 문화 노동자 등)이 미국의 결혼과 가족 정치학에 대해 논의한 이후에 여러 활동가들의 서명을 받아 발표한 선언. 결혼과 가족에 대한 격렬한 의견충돌(spirited disagreement)이 있었지만, 참가자 모두 “동성결혼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선언에 모두 동의하는 입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알려진 조안 엘리자베스 바이런, 웬디 브라운, 샬롯 번치, 주디스 버틀러, 존 데 밀리오, 베티 도슨, 바버라 에런라이크, 코코 푸스코, 주디스 할버스탐, 로라 키프니스, 그웬덜린 밍크, 자스비르 푸아, 조앤 W. 스콧, 주디스 스테이시,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이 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보러가기]
작성자: 나기, 난새
김-김 동성결혼식으로 ‘동성결혼’이 화두로 떠오른 이후, 비혼 L에게는 자아분열급의 질문들이 날아듭니다. 그동안 우리는 그저 법적, 제도적으로 동성결혼이 인정되지 않아서 ‘비혼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일까? 우리의 비혼은 ‘비-이성애혼’이었을 뿐인 걸까?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구호로 ‘동성결혼’은 적합한 것일까? 마냥 축하하기에도, 마냥 팔짱끼고 있기에도- 어느 쪽도 그다지 편하지는 않은 이 시점에, 애매한 속마음이라도 함께 나눠보자고 비혼 L 커플 세 쌍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동성결혼’을 이슈화하는 길 옆에 서서 비혼 L들은 어디로 걸어가고 있을까요?
| [쌍쌍대담]은 2013년 10월 6일에 이루어졌습니다.
| 대담진행 : 난새, 나기 | 녹취 및 정리 : 나기
쌍쌍 1 – 시선 (직장인) & 인천 (직장인) | 0.5년차 커플
쌍쌍 2 – 소리 (NGO활동가) & 액트 (대학원생) | 3년차 커플
쌍쌍 3 – 토로 (직장인) & 시스 (직장인) | 7년차 커플
지난 9월 7일 청계천에서 김승환-김조광수씨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1년여 전부터 예고하기도 했고, 언론이 많이 기사화 하기도 한 공개 결혼식이었습니다. 두 사람, 나아가서 두 사람의 가족들이 대사회적 커밍아웃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는 점, 동성커플에게 있어서 실천/의식/제도를 일치시키려는 액션이자 혐오에 대한 액션이었다는 점에서,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성소수자들과 그 외 그 결혼식을 인지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의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돌려받지 못하는 축의금, 결혼식 전/후로 의미 있는 관계이지도 않았거나 혹은 앞으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 없는 타인의 결혼식 참석에 대한 덧없음, 이분법적 성별 규범, 가부장적 상징으로 뒤범벅된 결혼식에의 신물남, 결혼식장이라는 공간이 가진 가족중심성 등, 이미 ‘결혼식’ 그 자체에 여러 번 지쳐온 비혼인들. 이 결혼식이 동성커플의 결혼식이었다고는 하지만 결혼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은 여전했습니다.
박수치는 ‘불편한’ 하객들
시선 : 큰 이벤트로 사회적인 이슈를 만들고 평범한 사람들도 알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구나 하는 점에서 지지하는 마음으로 갔다. 인천이 먼저 가 있었는데“주여! 동성커플에게도 우리와 같은 지옥을 맛보게 하소서”하는 플랜카드 사진을 보내주어서 봤다. 이게 내 마음과 같지는 않지만, 이렇게 말하는 게 정확한 것 같다. 공연도 하고 지지발언도 하고 (이성결혼과) 다른 행사긴 하지만 (동성결혼을) 낭만코드로 설득해내는 행사였다는 느낌이다.
토로 : 여러 행사 중의 하나로 여겨져서 꼭 가야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시스 : 헤테로 여성활동가는 꼭 가야하는 행사로 생각하더라.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나의 정치적 성향, 지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소리 : 아는 사람 결혼식도 안 가는데 굳이 초청받지 않은 곳에 갈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 같다. 결혼식 전부터 웨딩촬영이다 뭐다 이성애 커플도 보통 하는 걸 안하려고 노력하는데, 김-김 커플은 오히려 더 정식으로 하려고 해서… 복잡한 심경이었던 것 같다. 알리는 건 중요한 것 같지만 내가 하고 있었던 비혼 운동과 맞닿으면서도 맞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액트 : 이성애 커플 결혼과 동성애 커플 결혼의 의미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50%는 긍정적으로 생각이 되기도 했다.
소리 : 그걸 운동의 한 부분으로 축하하기에는 그 사람의 결혼이 나와 어느 정도 연결이 될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턱시도와 드레스라는 성별화된 의복, 아버지가 신부의 손을 신랑에게 건네주는 남-남의 여성 거래, 주례는 신랑의 은사, 사회는 신랑의 친구라는 공식 등. 이분법적인 성별 고정관념 뿐 아니라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성애 결혼식은 각각의 상징들에 굉장한 낭만성을 부여하면서 그 형식에 권위를 더해왔습니다. 동성커플의 결혼식은 그 이성커플의 결혼식에 부여된 낭만성을 희구하면서도 여러 가지로 ‘충족시키지 않는/못하는’ 조건들 때문에 기존의 결혼식이 수행해온 젠더 규범의 재생산에 균열을 가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는데요. 그러나 성소수자의 결혼식이 기존의 형식을 ‘비판적 발전’시키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요? 동성커플의 결혼식이 의미를 가지는 지점은 무엇일까요?
결혼식 이외에는 아직 아무것도…
소리 : 친구들 결혼식 가보면 만난 지 2달밖에 안되고. 정말 형식적으로! 식도 1~2시간 안에 끝내야 하고 가족들, 친구들 보여주기 식으로 하는 그런 게, 껍데기고 별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이게 동성결혼으로 오면 가족을 부를 수도 없고, 공공연하게 회사동료를 부를 수도 없고, 식순과 상관없이 의미가 많이 바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시스 :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거나 그러지 않아도 결혼식만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은 한다.
액트 : 좀 다른 얘긴데, 얼마 전 만난 지인과 얘기를 하는데 이 분이 동성결혼을 하고이혼을 했다는 거다. 그 다음에다른 분과 사귀다가 헤어지고 이랬는데 나는 ‘도대체 이 둘 차이가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동성결혼을 했다가 헤어진 건 이혼이라고 표현을 하고, 또 그만큼 사귀었다가 같이 살다가 헤어진 건 이혼이라고 안하고.
토로 : 결혼을 안했으니까- (일동 웃음)
액트 : 나는 둘 차이가 도대체 뭔가 했는데 그 사람은 결혼한다고 했고 사람들을 초대했고 식을 했다는 거야. 그럼 그건 결혼이야. 8, 9년을 사귀어도 식을 안올리면 연애야.
토로 : 그러니까 동성결혼은 결혼식 말고는 다른 지점이 없는 거지. 살면서 더 부착되는 게 없는 거다. 혼인신고도 없고 친족도 안 생겨, 애도 없어 이러니까 ‘결혼식이’ 결혼했느냐 안했느냐를 구분하는 유일한 점이 있는 거지. 그래도 이혼은 할 수 있네. (일동 웃음)
살아온 날들에 대한 인정, 살아갈 날들에 대한 격려
시선 :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나는 전부터 결혼식 자체를 좀, 중간 점검의 형태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시작할 때 축하를 하는 게 아니라. 까보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거고, 정말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이런 건데. 그런 세레모니 보다는 오래 살고 우리 잘 살았다 앞으로 잘 살자 이런 의미로 결혼식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성커플의 결혼식이라는 게 사실 그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결혼식만 해도 두 분이 오래 사귀었고 긴밀하게 지내다가 한 거니까. ‘우리 이제 부부로 시작하겠습니다’ 보다는 이미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의미로 기존의 이성애자 결혼식보다는 좀 바꾸면서 가져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소리 : 결혼식에 거부감이 있고 비혼주의자니까 ‘결혼식 하고 싶다’ 이렇게는 생각 안했었는데, 같이 산 지 1년 정도 됐을 때 뭔가 되게 ‘축하받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말고는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니까. 조금 더 축하받고 싶다, 누군가 알았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있었다. 그때 정말 지지를 못 받고 있다고 느꼈고. 밑도 끝도 없이. 곳곳에 살고 있는 커플들이 크게 보면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한테 우리 1년 동거 기념 파티 한다고 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까지 연락을 돌렸다. 동네 사람들 위주로. 20명 정도 와서. 아기자기 하게 포스트잇에‘축하메시지 적어주세요’ 이런 것도 하고, 홈 파티처럼- 여행 다녔던 사진들 둘 밖에 못 보지 않나. 친구들한테 못 보여주니까. 그런 거 디스플레이해서 보여주고 주변 사람들한테 방명록도 받고 이런 행사를 했었는데, 그게 되게 그 뒤에 사는데 있어서 힘이 되었던 것 같다. 혼자가 아니구나, 둘만이 아니구나, 연결이 되어 있구나 연결성을 좀 찾고 나니까 그 이후에 사는데 있어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나한테 결혼식이라면 그런 의미다. ‘시작한다’ 이런 게 아니라, 누가 존재를 알아줬으면 좋겠는 그런 거 같다.
액트 : 동네에서 인사할 때 우리가 남녀 신혼부부라고 한다면 부부들 이사왔냐 이야기하겠지만, 이게 아니니까. 둘이 살고 있지만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 있어서. 그렇게 초대를 하고 나서 사진 강제로 보게 하고 나와서 먹게 하고 했지만 그게 되게 좋았던 것 같다.
소리 : 2주년 됐을 때는 더 이상 그런 행사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토로 :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사귀고 있으면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커밍아웃 해보자, 지금까지 50년을 사귀었다는데 50년 연애에 대적할 혐오가 있겠냐,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있다. 60, 70살 되면 다른 두 사람이 맞춰가면서 그 정도 관계를 유지했다는 그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금혼식, 은혼식을 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결혼을 하자는 게 아니라, 세월의 힘을 보자는 것이다. 시선이 이야기했던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스스로 굉장히 불안정하다고 생각하는 거나, 친구랑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지낸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남자한테 관심이 없어서 친구랑 산다고 그러는 거. 그러는 거에 대해서는 아무리 말해도 세월의 힘이 중요한 것 같다. 뭔가 세레모니를 한다면 시작하는 시점보다 그렇게.
시스 : 너희의 혐오보다 우리의 세월이 더 강력하다, 이렇게.
식 자체에 부여된 낭만성에 대한 욕망도 있을 수 있겠지만, 굳이 사람들을 초대해서 결혼식을 한다는 것은 왜 일까요? 공개적인 식을 통해 커플로 인식되고 호명되기를 바라는 마음, 커플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바라는 욕구 때문이 아닐까요? 두 사람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주고 실질적으로 ‘헤어짐’의 불안을 감소시킬 수 있
는 것은 식 그 자체라기보다는, 식을 통해 드러난 파트너십이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주변의 관계망을 통해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느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사람만 아니라 이 ‘파트너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얘기하고, 조언도 듣고, 필요한 게 있으면 구하기도 하고, 맡길 게 있으면 맡기기도 하는 일상적인 돌봄의 네트워크가 부족할 때 관계는 취약해지기 쉽겠죠. 식을 통한 공인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혼 L 커플들은 관계망의 부족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을까요?
연속적인 ‘관계’에 대한 욕구
시스 : 둘이 살겠다고 하기 전까지는 공동체 가족을 꾸려왔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이랑, 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랑. 언니들이랑 살 때는 언니들에게서 공동체 가족을 꾸려가는 것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고 지지받고 그러다가, 어린 사람들이랑 살 때는 우리가 양부모처럼 계속 돌보고 성장하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계속 공동체 가족으로만 살아왔었다. 공동체 가족으로 살아야지- 그런 게 아니라 갈 곳이 없는 사람을 받아주고 받아주고 하다보니까 가족이 되고, 이런 식으로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만들어졌던 거다. (지금 둘이 살기로 한 것도) 앞으로 영 포기하고 둘만 살겠다 이런 건 아니다.
소리 : 지속적으로 넓혀나가고 구축해나가는 중인 것 같다. 처음에는 정말 숨기려고 했었는데 안전한 사람에게 점차적으로 말하고 애인도 소개하고 그러면서. 일하는 곳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많이 지지가 되는 것 같다. 정체성도 같고 정기적으로 모이고 비전도 같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관계에 안정감을 가지는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처음보다는 내 안의 두려움도 많이 없어지고 안정감을 느끼고 그렇다.
액트 : 좀 다르게 받아들였는데, 내 개인적인 친구들이 애인과의 관계를 알고 애인이 친구들과 자기들끼리 모였을 때 나를 알지만, 어쨌든 ‘이 사람의 친구인 관계’ 이렇게 별개로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둘을 동시에 알고 지켜봐주면서 우리 둘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관계를 사실 굉장히 원한다. 그게 계속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 : 나는 처음에는 커플로 묶이는 게 되게 싫었다. 그런데 액트는 계속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어왔고 이제 그 중간 지점을 찾는 중이다. 만든 모임 중에 커플 모임을 만들어서 이제 열심히 참여해보려고 하고 있다.
토로 : 부부동반 모임을 선호하시는군요.
액트 : 아니 그게 딱 부부동반모임은 아니에요.
토로 : 그렇겠지. 부부가 아니니까. (웃음)
액트 : 우린 이혼할 수 없으니까. (웃음) 어쨌든 커플 모임이라고 정한 건 아니지만 가다보면 서로 상담이 되는 관계가 되고. 나는 이런 걸 바랬던 거다. 내가 얘 욕을 해서 내 편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고 이런 게 아니라, 두 사람에게 관계를 지켜봐주면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리 : 나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성숙한 개인들이 성숙하게 하면 관계가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지나다 보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장기적으로 봤을 때 커플로 뭔가 공유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액트 :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커플 상담을 두 번 받았다. 우리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어서. 두 번 받았는데, 처음에는 같이 살기 전에 한 번 받아서 우리가 같이 살면 성격이 어떤 게 부딪히겠다 싶은 것을 상담 받았고, 얼마 전에는 같이 산 지 어느 정도 됐으니까 한 번 더 받았다. 레즈비언 상담가에게. 나는 그런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스 : 나도 그런 적 있다. 사주를 보러 갔었다. (일동 웃음) 싸우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 이런 조언도 받고. 되게 중요한 조언이었다.
인천 :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레즈비언 친구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동네에 사는 레즈비언 커플, 일반 친구 커플이 있는데, 구분하지 않고 커밍아웃 한 친구들하고는 지속적으로 인사하고 관계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시선이 아는 커플 중에 사귀면서 알게 된 커플이 있어서 만나는데 그런 게 좋은 것 같다.
액트 : 커플 모임이 꼭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우리 둘을 동시에 아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소리 : 연속성 있는 관계가 정말 필요한 것 같다. 1, 2년 중에 한 번 보는 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성애커플 같은 경우에는 가족이 그런 관계가 아닐까 싶은데.
토로 : 아니, 이성애 커플은 정말 부부동반 모임을 많이 한다. 정말 많이 모여, 부부가 한 세트로. 그런데 들어보니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
소리 : 커플이 연속체이지 않나. 동성커플 같은 경우에 커플의 모습을 띄엄띄엄 보는 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보고 알아주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토로 : 그런데 커플끼리 만난다는 생각 없이 만나면 연애 이야기가 전혀 안 나와. 그 연애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평소에 조금씩 조금씩 공유가 되어있을 때 문제가 생긴다면 개입하거나 도와주거나 이럴 수 있는데, 커플로 묶여서 만나지 않으면 실제로는 두 커플 4명이 있지만 각자의 연애의 얘기는 1박 2일 동안 있어도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 정체성를 가지고 만나는 게 지금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성결혼’이라는 단일해 보이는 구호 안에 담긴 욕구들, 주장들은 사실 세세하게 뜯어보면 서로 다른 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다,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지 않고 싶다, 눈에 보이는 존재이고 싶다는 욕구, 오래도록 함께 살며 실질적인 돌봄을 수행하고 있을 때 그 돌봄의 노동에 대한 지원을 받고 싶다는 욕구, 병이나 빈곤 따위의 불행이 닥쳐왔을 때 구제받고 싶다는 욕구,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고 싶다는 욕구, 헤어졌을 때 함께 살았던 세월에 대한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 등등.
사실 이것들은 성소수자만의 욕구가 아닌, 이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리고 싶지만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법률혼으로 배우자의 지위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욕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이 다른 모든 욕구들을 ‘동성결혼’으로 묶어서 주장한다면, 여전히 결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설 자리를 좁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요?
전략적 구호로서 ‘동성결혼’
액트 : (성소수자에 대한 권리를) 빨리 이루기 위해서는 앞에 동성결혼을 놨을 때 더 빠르게 나갈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어쨌든 결과를 얻는다면. 일반 사람들에게 설득할 때는 결혼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서 넘어가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독일에서 동성결혼을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절대 똑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동성결혼을 제도화한다고 해서 그 덩어리를 굴려넣었을 때 반이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토로 : 우리나 이해하지,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파트너십’은 듣도 못한 소리고, ‘호주제 폐지’나 ‘성매매 반대’ 이렇게 명확한 슬로건이 있어야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데. 사람들의 인식에서는 동성결혼이 더 잘 이해된다. 반대도 입장인 거거든. “동성결혼 반대한다” 이런 말이라도 할 수 있으려면 ‘다양한 파트너십’이나 ‘보편적 복지’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거지. 동성결혼이라는 것 만한 키워드를 아직 못 찾은 것 같다.
시스 :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세상에, 결혼까지 하겠다니’ 같다. 결혼이 최후의 보루처럼 되어 있어서 이것에 균열을내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게 담론을 확장시키지 않을까 싶다. 성매매나 성폭력이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반성매매’, ‘반성폭력’ 이런 구호가 가장 파급력이 있는 것처럼. 운동이 꼭 그 방향을 택해야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략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결혼의 분리
토로 :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묘한 감정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약간 알 것 같다. 김-김의 결혼이 혼인신고서도 받아들여지고, 보험도 서로 되고, 보통 결혼하면 쫙 다 따라오는 그런 게 다 가능해졌으면 좋겠는 마음과, 그렇게 하면 할수록 결혼의 의미는 더 무거워지겠구나, 결혼은 정말 대단한 거라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저런 혜택과 더 멀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사람들이 가지고 싶은 권리를 다 가졌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게 결혼이라는 것를 통해서 갖는다고 하니까 나와는 권리들이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시스 : 이제 결혼하지 않은 레즈비언은 뭐라고 핑계를 들어야 되나?
토로 : 그래. 이제 뭐라고 하면 ‘너도 결혼하지 그래’ 이런 말을 듣는 거지. (일동 웃음) “왜 안 되나요?” 이러면. “마일리지 주고받고 싶으면 결혼하세요.” 이러는 거지. (웃음)
소리 : 먼저 동성결혼을 쟁취해놓고, 이성애 결혼을 해체해 놓고 다른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라면 동의할 수 없다. 처음부터 방식이 달라야 하지 않나. 처음부터 파트너십 논의로 가야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다양한 가족구성권에 대한 운동을 결혼을 통해서 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토로 : 결혼으로 주는 혜택이 줄어들고, 결혼-출산-양육을 세트로 가는 걸 분리해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동성결혼이란 제도를 도입을 하면 그게 많이 분리가 되지 않을까. 사람이 입양을 하거나 출산을 하지 않을 테니까 기존에 결혼에 묶여있던 권리들에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까?
시선 : 지금 사회에서 공인되는 공동체가 가족밖에 없는 건데 거기에 너무 많은 의미가 들어가 있다. 돌봄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보면 무엇에 대해서 지원을 하는가라는 차원에서 관계라는 게 재구성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토로 :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돌봄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완전 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면 개별적인 돌봄의 수행에 지원을 해줘야 한다. 이 사람이 동성결혼을 했든 동성결혼도 못 하든 뭘 하든 간에, 보편적으로 주어져야하는 복지가 있는데 안주어지는 게 문제인 거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법률혼의 커플/가족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전략적으로’ 접어두더라도, 그 권리들이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가능해진다고 해서 정말 누릴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아득해집니다. 한국은 아직 군형법에 동성애를 처벌하는 조항이 있을 정도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편견이 강하고, 폭
력과 차별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차원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조차 엄청난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반대로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주택자금 대출을 받으려고 ‘저희 동성커플이예요’ 하고 서류를 내밀고, 파트너가 수술 받아야 할 때 ‘제가 동성배우자입니다’ 하면서 동의서를 써줄 수 있을까요? 법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과정은 커밍아웃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있을까요? 동성결혼이 이슈화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성소수자 혐오가 줄어들기를 희망하지만 안타깝게도 동성결혼이 제도화된 나라에서도 차별과 혐오는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동성결혼 이외에도 다른 목소리가 꾸준히 함께 나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시선 : 나는 동성결혼이든 파트너십 법이든, 이 이슈가 동성애자의 삶이라는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애자’니까 성애를 가지고 누군가와 섹스를 하고, 이런 사람으로만 상상이 되는 거다. 이성애자는 그렇게 상상되지 않는다. 직장에 가면 직원이고 학교에 가면 학생이고 풍부한 일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상상되지만, 동성애자는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권리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슈들, 직장에서 노동하는 것, 커밍아웃 하는 것이 사라지고 친밀성에 대한 욕구와 불만이 엄청나게 있는 사람으로 상상되는 게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토로 : 동성결혼이든 뭐든 이런 거랑 상관없는 복지가 필요하다. 기본소득제에 관심이 있다. 성숙한 파트너십도 한쪽이 다른 한쪽을 먹여살려야하는 게 숭고한 상황이지만, 좋은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혼한 이성애 커플도 결혼한 여자가 기본소득을 다 가진다면 빠른 속도로 해체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리 : 제 삶의 질을 생각했을 때, 지금까지는 굉장히 거창한 ‘가부장제 폐지’ 이런 것을 생각했다면 지금은 가까운 사람에게 눈치 보지 않고 ‘나 동성파트너 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게 운동의 목표가 되지 않을까.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많이 변화해야 한다. 결혼이 발달과정의 하나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다. 동거하는 거 어때? 오래 못가고 깨지면 어때? 이런 여러 갈래들이 생겨나면 좋지 않을까.
시스 : 정상가족은 정상가족이 아닌 존재들이 있기 때문에 역으로 정의되는 거다. 비존재들이 존재를 드러낼수록 정상가족이 해체되는 거라면, 비존재들이 제도 안으로 들어가거나 경계에서 왔다갔다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략다운 것을 고르라면. 이 비정상성을 계속적으로 드러내는 수밖에 없지 않나.
작성자: 무다
해당 글은 아카이브 자료 공유 동의를 기다리는 있는 글로, 작성자의 허락을 구한 뒤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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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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