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5일
[성명서] ‘여성가족부’에 반대합니다!
다양한 삶의 형태를 선택할 권리,
여성이 가족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행복할 권리를 위해
여성가족부에 반대합니다!
가.족.
당신에게 가족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최근 tv를 통해 간간히 볼 수 있는 광고 하나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선물한 목도리가 며느리에 의해 시아버지에게로, 할아버지에게서 손녀에게로 건네어져 다시 아빠에게 되돌아오는 모습을 ‘연출’하는 광고입니다. 마지막은 나래이션으로 정리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말. 가족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뜨는 ‘공익광고협의회’의 로고.
당신이 생각하는 가족도 이런 모습인가요? 아니면 얼마 전, 설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서 서로 뾰족이 할말도 할일도 없는 그 공간을 채우던 전쟁 같은 풍경들-‘「남자」친구는 있냐’는 둥, ‘시집은 언제 갈꺼냐’는 둥, ‘살이 쪘네, 빠졌네’ 라는 둥, 내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수행하라고 요구하는 친척들의 간섭, 한편에서는 친척 누군가의 이혼이 인생의 재앙처럼 은밀히 이야기 되고, 제사와 식구들 끼니 준비만으로도 하루 종일 쉴 틈이 없는 부엌에서는 어머니의 허리가 휘어가고 있는…,
그 기억이 다시 떠올라 진저리를 치게 하나요?
가.족.의.위.기.가.아.니.라.가.족.때.문.에.위.기
오랜 세월 동안 이성애 ‘정상가족’ 안에서 어머니로, 딸로, 아내로 살아온 여성들의 경험은, 그 곳이 무작정 안전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을, 아내폭력이 목격되고, 여성에게 가사노동과 출산/육아를 강요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노동권을 박탈하고, 이성애 중심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실행되는 공간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어머니, 딸, 아내였던 그녀들은 이제 ‘가족’ 밖에서 다른 삶들을 기획하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녀들은 출산파업을 하고, 이혼을 결심하고, 비혼의 삶을 살아가고, 혈연과 결혼으로 묶이지 않았지만 혈연과 결혼으로 묶인 이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함께 할 수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많은 언론들은 이런 그녀들의 선택을 ‘가족의 위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정부가 나서서 존재하지 않는 가족의 감동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미 실현되고 있는 삶의 방향들에 역행하는 이런 정부의 「가족」복구를 위한 몸부림은 단지 공익광고에만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국가의 이런 몸부림이야말로 ‘위기’입니다. 1) 가족 이야기라면 이제 더 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지긋지긋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시 가족을 다른 목소리로 말해야 합니다. 정부의 이런 몸부림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여.성.가.족.부.
특정한 형태의 가정만을 ‘건강한 가정’이라고 보고 다양한 형태의 삶을 소외시키는 건강가정기본법 시행에 뒤이어, 이제 올해 6월부터 여성부가 없어지고 여성가족부가 신설된다고 합니다. 국가 행정부처의 이름에 ‘가족’이 명시되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더구나 여성-가족부라니요. 가족 구성의 권리는 없이 가족 유지의 책임만 여성에게 전가되어 왔고, 어머니, 아내, 딸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정당해 왔는데, 정부가 나서서 다시 ‘여성’과 ‘가족’을 튼튼히 묶겠다는 것입니까?
여성부가 보여주는 많은 한계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성부가 해왔던 남녀차별과 성폭력, 성매매를 방지하기 위한 업무들은 분명 어떤 성과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성가족부’가 되면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의 틀 안에서, 그 틀을 지키는 방향으로 흐르기 쉬우며, 이것은 분명한 퇴행입니다. 또한 ‘가족’을 대상으로 정책을 시행한다는 건 결국 ‘정상가족’이거나 그와 비슷해야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3) 이는 ‘가족’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행복해지기 위해 이혼을 선택했던 한부모 가족은 ‘위기 가족’으로 낙인찍힌 후에야 ‘복지와 상담’의 대상이 됩니다. 4) 동성 가족은 ‘정상가족’과 얼마나 비슷한지 증명할 것을 요구받게 되며, 가족을 구성하지 않는 비혼 여성의 삶은 아예 존재할 공간조차 사라져 버립니다.
여.성.가.족.부.를.반.대.한.다.
정부가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한 기초적인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복지를 ‘가족’을 중심으로 제공하겠다는 것은 개인으로 살아갈 권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아갈 권리를 정부가 나서서 박탈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여성부를 개편한 여성가족부를 통해 가족을 복구하려는 정책을 펴는 것은, 가족의 틀 속에서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이미 다르게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삶을 배반하고 무시하는 일입니다. 이미 여성의 삶이 가족과 얽혀 있는 상황에서 가족 역시 운동이 일어나는 장이어야 하겠지만, 가족 안에서만, 그리고 가족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내 삶의 모습을 간섭받지 않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받을 권리. 이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여성가족부의 등장에 반대합니다. 여성을 둘러싼 차별적인 조건들 속에서, 가족 구성원으로서가 아닌 개인인 여성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 여성가족부가 아닌 여성부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시정해 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가족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개인들 간의 자율적이고 다양한 파트너십과, 가족 단위가 아닌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복지, 아동복지, 노인복지입니다. 6)
다.른.목.소.리.들.로.
언니네트워크 액션나우팀은 언니네트워크 회원들이 다양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누는 자리인 「월례수다모임: 뜨거운 감자 7)」 2월의 모임 주제로 「심란하다, 여성가족부」를 제안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그 자리에 모인 네트워크 회원들이 생산해낸 고민과 말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성명서를 발표하자!’라는 의견 또한 그 자리에서 모아진 것입니다. 감자모임에서의 수많은 의견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이므로 섞여 있는 말의 출처들을 모두 선명히 밝힐 수는 없지만, 분명하게 인용해온 문구가 있는 경우나, 맥락을 더 풍부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출처가 있는 경우 주석을 달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발표’될 뿐인 기존의 성명서 쓰기 방식에서 벗어나, 성명서가 쓰여지는 과정 자체를 공개하기 위한 시도이며, 이 역시 2월 감자모임을 통해 결정된 것입니다.
또한, 이 성명서는 완결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2월의 감자모임에는 오지 못하셨지만, 가족에 대해, 여성가족부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 언니네트워크 회원들의 더 많은 목소리들에 열려져 있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명서입니다. 이 글을 읽고 어떤 부분들에 동감하고 있는, 그리고 더 많은, 더 다른 말들을 품고 있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05. 3. 5. 언니네트워크
www.unninetwork.net
(초안작성 : 열)
※ 이 성명서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담은 릴레이 성명을 꼬리말로 달아주세요~
1) 2월 감자모임 「심란하다, 여성가족부」준비 회의 中 시타의 말
2) ‘개인적으로 가족얘기를 하기 싫지만 국가 정책이 나에게 줄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이야기 하는 거죠. 릴레이 성명 쓰게 된다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풀어서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월 감자모임 「심란하다, 여성가족부」속기록 中 고동의 말
3) 성명서 초안에 덧붙인 감자모임 참석자 술래의 의견
4) ‘항상 가족 위기 담론 얘기하면서 “결손가정”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에, 실제로 소위 “결손가정”에서 자란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들의 논리에 따라 소외되게 된다. 그들 스스로 행복할 수 없게 만드는 언설은 개인의 행복을 침해하는 나쁜 짓인 것 같다.’ 2월 감자모임 「심란하다, 여성가족부」속기록 中 샘의 말
5) ‘가족 담론이 나오고 여성부에서 가족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이전부터 단체들이 해왔던 평등가족 사업들이 힘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현재 여성계 내부에서 “새로운 아젠다를 찾자”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족 얘기와 결부되어진다면, 여성가족부로 바뀌는 것은 훨씬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나,를 생각해봤을 때 가족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가족이라는 게 운동의 한 부분이 될 수는 있겟지만,.. 여성과 가족이 같이 가는 것이 운동을 매우 좁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2월 감자모임 「심란하다, 여성가족부」속기록 中 조제의 말
6) 성명서 초안에 덧붙이는 메두사의 의견
7) 애칭 ‘감자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