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3일
언니네 채널[넷] 칼럼 비혼열전-영혼을 위한 흰 히아신스
작성자: 몽
언니들. 이런 경험 있으세요?
‘난 비혼이야’라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그 상대가 떠올리고 있을 것 마음속의 말들이 말풍선처럼 그려져 눈앞에 뿅뿅 나타나는 순간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그러다간 한평생 외롭게 살다가 늙어서 시체로 발견될텐데…’, ‘아직 제대로 된 사람(남자)를 못 만나서 그래~’ 이런 만들이 들리는 것 같단 말이죠. 정말 비극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종국엔 그런 말들을 듣게 된다는 거예요.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초라하고 비참하죠. 하지만, 단 한번도 ‘혼자’ 살거라거나, 누군가와 평생 특별한 관계를 맥지 않을 거라고 말한 적은 없다는 거, 그 사람들은 알까요?
사랑, 평등, 야심, 자기 성취감, 낭만적 우정, 갈구하는 눈길, 뜨거운 연애편지…….
아, 하나하나 곱씹어보아도 (너무 좋아서)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이 단어들의 조합이라니!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뽑아낸 문구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을 것만 같아요. 하지만 실은 비혼으로 살아갔던 여러 언니들의 인생을 요약하는 단어라고 한다면, 너무 짜릿하지 않나요? 이제부터 그 언니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낭만적 우정과 ‘보스턴 결혼’
남북전쟁 이후로 미국에서는 서로에게 헌신적이고 낭만적인, 심지어 해방적이기까지 한 여자들의 관계가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보스턴 사람들>(1885)이라는 소설 제목에서 유래한 ‘보스턴 결혼’이 바로 그것이죠.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흔한, 여자들 사이의 우정을 그린 다분히 미국적인 이야기’인 이 소설의 제목이 어떻게 당시에 결혼이나 육아에 얽매이지 않고 진취적인 삶을 개척하는 여성들의 삶을 표현하게 되었던 걸까요?
답은 <텍사스의 풍운아(1986)>라는 의외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어요. 남북전쟁으로 수많은 남자들의 죽어가자,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 만큼의 많은 과부나 미혼 여성들은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막 이상한 법이 생겨나요. “사형선고를 받은 자라할지라도 살인법만 아니면 부동산을 소유한 신부 감이 보증을 설 경우 사면할 수 있다” 헉?! 남자 주인공이 사형당하기 직전에 결혼도 하고 금도 캐서 멕시코로 탈출한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보니, 전쟁이 끝나고 난 후에도 많은 언니들은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을까요, ‘걍 전처럼 우리끼리 살면 안되겠니…’
하지만 여기까지 쓰고 나니 좀 뭔가 찝찝하네요. 마치, 남자는 부족하고 여자는 남아돌아서 원치 않는 비혼의 길과 보스턴 결혼을 시작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흠… 하지만 ‘남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자마자 서로 상부상조 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한 여자들이 떼로 등장했다는 것이 조금 신나기도 하지 않나요? 어쩌면 그건 계기였을 뿐일지도 몰라요.
‘보스턴 결혼’의 가장 큰 특징은 여자들끼리 함께 살기 시작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공동의 가치관과 관심, 배움에 대한 강한 열정, 서로의 영혼과 창작열에 자양분을 주는 책임 있는 관계, 바로 이런 것들이 그녀들의 ‘결혼’을 지탱시키는 힘이었던 것이죠. 물론 ‘동거’ 여부가 낭만적 사랑과 보스턴 결혼을 구분짓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했지만요^^ 그럼 ‘보스턴 결혼’을 한 대표적인 언니들을 만나러 가볼까요.
당신의 나의 흰 히아신스
미국에서 환경운동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책 <침묵의 봄>의 저자, 레이첼 카슨을 아시나요? 하지만 그녀의 삶에서 <침묵의 봄>만큼이나 중요한 한 사람이 있어요.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함께 바닷속 생물들을 수집해 망원경으로 관찰하고, 바닷가 별장 마당에 앉아 조수 소리를 듣기도 했던 그녀, 도로시 프리먼.
‘보스턴 결혼’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레이첼 카슨이 46살, 도로시 프리먼이 55살일 때 처음 만났다고 해요(게다가 도로시 프리먼은 결혼 29년차의 유부녀였답니다. 물론 도로시의 남편도 둘의 관계에 대해서 ‘지지’했다고 하는군요!). 레이첼 카슨이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계속 서로의 삶에서 창조적인 동반자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친구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최고의 사랑’으로서 만나게 됩니다.
“저는 요즘 아주 깊이, 감사히 생각하곤 합니다. 당신의 변함없는 헌신과 관심이 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요. 만일 그게 없었다면 지금처럼 모든 것이 암당하기만 할 때 과연 어떻게 헤쳐 나갈지 막막했을 겁니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동일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치된 의견은 아름답고 만족스럽고 위안이 됩니다. 설령 정확한 것과는 동떨어져 있고, 모든 신비와 장려함을 다 담지 못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 레이첼 카슨
“그대가 내 인생에 안겨준 행복감, 자연 세계에 대한 흥미와 통찰을 새로이 일깨워 준 점…… 하지만 그대도 그렇겠듯이 완벽하게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사람,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발견한 것이야말로 정말 믿기지 않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더한 최고의 기쁨은 바로 나에 대한 그대의 사랑이라는 선물입니다.”
-도로시 프리먼
(아… 옮겨 적는 저이지만 닭이 되어 날아갈 듯 합니다…)
나이가 들어 한참 뒤늦게 만났다는 것,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을 다 합쳐도 채 6개월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결혼한 도로시가 남편과 변함없이 애정 깊은 부부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거예요. ‘강렬했던 감정’의 폭풍우를 지나, 자신의 죽음 이후가 걱정되어 편지를 남겨놓을 정도로 서로의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이니까요.
서로 얼마만큼 사랑했냐구요? 도로시에게 레이첼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2페니가 있다면 1페니로는 빵을 사고 나머지 1페니로는 ‘영혼을 위한 흰 히아신스’를 사겠다고, ‘당신은 나의 흰 히아신스’라고요.
히아신스를 찾아
어쨌든 레이첼 카슨과 도로시 프리먼 역시 자신들 이외에 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 ‘미친 듯이 반한’ 감정 때문에 조금쯤은 괴로었을지도 몰라요. 충동적인 키스를 나누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이 도로시의 결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기도 하죠. 자연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탁월한 관찰력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유명작가 레이첼에 비해, 그 당시에 결혼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살아가야 했던 도로시는 레이첼과의 관계가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했을 거예요.
하지만 보스턴 결혼이 의미 있는 이유는 여자들끼리 모여 자신들이 가진 인생의 목표를 서로 공유하고, 경쟁과는 다른, 열정으로서의 자극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서로를 의지하고 존중하며 지지했다는 점-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맺어온 여타의 관계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이룰 서 있었따는 점일 거예요. 결혼이라는 ‘완전한’ 관계의 길을 벗어나 ‘불완전’ 하지만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여성들에게, 같은 길을 걸어가는 또 다른 여성들의 존재는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니까요.
언니들도 영혼을 위한 1페니의 히아신스를 찾으며 살아가고 있나요? 🙂
덧. 당시 미국에서 ‘보스턴 결혼’은 특히 여자의 꿈을 북돋아주는 여자 대학이나 여성 단체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우후후후.
[참고자료] 영화 <텍사스의 풍운아>
<독신의 탄생> 엘리자베스 애보트 저, 이희재 역. 2006. p. 572-581.
<레이첼 카슨 평전> 린다 리어 저, 김홍옥 역. 2004. p. 387-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