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prologue
chapter1. 털어놓다, 미치도록 행복하다
- 섹스에 관한 고백
- 자위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
- 나는 왜 그를 쉽게 용서했던 걸까
- 성정체성의 갈림길에서
- 내 몸이 원하는 걸 참고 싶지 않아
- 세상이 뭐라던, 내 멋대로 살고 싶다
chapter2. 남자들에게 진짜로 하고 싶은 말
- 섹스할 때, 끝까지 넌 이기적이었지
- 쿨한 남자? 나쁜 남자!
- 이런 게 성폭력이 아니라고?
- ‘사랑’이라는 말로 용서되지 않는 것들
- 이런 남자 정말 최악이다
- 아저씨들, 너나 잘하세요
- 나쁜 남자들은 뻔뻔하게도 다 알고 있다
chapter3. 여자로 산다는 것
- 비혼 여자로 산다는 것
- 유능한 여자로 산다는 것
- 이혼을 꿈꾸며 산다는 것
-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
- 사업하는 여자로 산다는 것
-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로 산다는 것
- 장애를 가진 여자로 산다는 것
- 착한 남자 되기 vs 나쁜 여자 안 되기
chapter4. 용감하게, 지혜롭게, 따뜻하게– 언니네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
- 성적 모욕에 대처하는 법
- 치졸한 상사를 향한 나만의 액션
- 성추행범을 강하게 혼내준 무용담
- 성에 관한 유쾌한 수다 한 판
- 버자이너 인터뷰
- 동침 중 자위를 허하라
- 여자들의 오줌 소리는 부끄럽지 않아
- 행복은 브라 컵 순이 아니잖아요
- 살림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 현실 속의 유토피아 만들기
chapter5. 자기만의 방을 가져라, 바로 지금
- 자신의 힘을 되찾아라
- 화끈하게 분노하라
- 소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즐겨라
- 노처녀를 칭찬하라
- 혼자 여행을 떠나라
- 지구와 공존하는 삶을 살아라
- 모든 폭력에 맞서라
- 굴하지 않는 용기를 지녀라
- 여자친구를 네 인생의 동반자로 만들어라
첫 번째, 자기만의 방
내가 처음으로 나만의 방을 갖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언니와 함께 방을 쓰다가 처음 내 방을 갖게 된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그동안 언니와 공유하던 책과 옷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이기에, 슬프기도 했다. 내 방에는 더 이상 언니가 보지 않는 책들과 언니가 쓰지 않는 책상, 그리고 더 이상 언니의 몸에 맞지 않는 옷들만이 남았다. 반면에 언니는 자신의 방을 새로운 물건들로 채워나갔다. 나의 새해는 언제나 언니의 지난해를 물려받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그렇기에 나의 성장기는 곧 언니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나만의 방이 나의 것으로 채워지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많이 필요했다.
비밀이 생기다.
하지만 내 힘으로 방 한 칸을 온전히 얻는 일이 갑자기 가능해질리 없었다. 서른이 넘은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내 방이 생기기는 했지만 방문을 잠그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방은 부모님들의 것이었다. 난 피로 맺어진 나의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같이 사는 게 반드시 서로에게 더 행복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과 말하고 싶지 않은 관계들이 생겨나면서 그 생각은 더욱 강렬해져갔다. 말하지 못한 것들, 말하지 않은 것들은 점점 비밀이 되고, 두껍고 무거운 장막이 되었다. 비밀을 공유하는 특별한 몇 명의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비밀이 되는 순간부터 관계의 밀도는 너무 높아져 서로를 종종 질식시키기도 했다. 어느새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털어놓다. 미치도록 행복하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비밀은 아주 특별하고 소중해서 혹은 너무 충격적이고 놀라워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편견과 사심 없이 진심으로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밀이 되는 이야기들이다. 처음에는 그저 가볍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이야기를 들어 줄 적당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면서 비밀은 점점 무거워진다. 하지만 만약 잘 들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그 이야기들은 비밀도, 나를 설명하는 유일하고도 특별한 것이 되지도 않으면서, 그 이야기들을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놀랍게도, 언니네 방에 모인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결코 비밀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비밀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을 신들린 것처럼 털어놓는 사람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어느새 나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말들이 내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처음 언니네에 방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와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그리고 축하해요.” 그 평범한 말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축제에 중독되다
언니네 방에 중독되는 과정은 이렇다. 누군가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하면, 언니네에 있는 언니들은 처음에는 숨죽이고 귀기울인다. 다만 그 글에는 당신의 심정에 공감하고, 지지하며, 감동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표시될 뿐이다. 그 다음 의자매를 맺자는 쪽지가 오거나, 열렬한 답글이 달리기 시작한다. 대체 어떤 사람들 이길래 이러는 건지 궁금해지면 그 방에 놀러 가게 되고, 거기 쓰여진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혼자가 아니었구나 하는 따뜻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낼 때 나 역시 그 글을 숨죽여 읽고, 공감하며, 말을 걸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다 같이 힘껏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무용담을 이야기하면 크게 박수치면서 땅을 치고 웃기도 하고, 처음에는 그저 뾰족하기만 했던 누군가 사실 당신들과 있어서 행복했다는 말이라도 하면 그야말로 언니네 방은 축제처럼 들썩들썩 흥겨워진다.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 힘껏 노력해온 여자들은 즐거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달에 몇 번이고 축제를 만든다.
평생 한번쯤은 여자들과 함께
이곳은 여자들이 평생을 사는 동안 한번쯤 와보면 좋은 곳이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용감하고 재미있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면 그때가 바로 언니네 방에 와볼 때다. 내가 혼자가 아닌 곳, 내가 나일 수 있는 곳, 여자로서의 삶을 축복하며 스스로와 다른 여자들을 사랑스럽게 볼 수 있는 곳이 어딘가에 또 있다면 그 곳에 가도 좋다. 다만, 그 중의 한 곳이 언니네 방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 실린 글들은 지난 5년간 언니네 방에 차곡차곡 쌓여온 수만 개의 글들 중에서 추리고 추린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책에 글을 싣도록 허락해준 분들과, 그동안 언니네 방을 풍요롭게 만들어 온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꿈틀과 샘, 페이퍼문이 한겨울을 함께 보내며 언니네 방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골라내는 어렵고도 즐거운 작업을 함께 했다. 여기 실린 이야기들만큼 굉장한 글들이 아주 많았다는 말로 그 모든 과정이 짐작 될 리 없겠지만,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 말이었다.
“언니네 방에 같이 가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