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2017.2.24~26)
세션1-1.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
2017.2.25 오전10:00~12:00
발제1.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
더지(언니네트워크)
2016년 제8회 LGBTI 인권포럼의 문을 열었던 첫 토론회의 제목은 <Gay in the Mirror, 우리 안의 여성혐오>였다. 여성혐오에 맞서는 새물결을 일으킨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메갈리아’ 사이트 내에서, 2015년 11~12월경 정점에 치달은 ‘게이 논쟁’을 화두로, 나는 당시 “메갈리아는 왜 ‘게이논쟁’을 필요로 했는가?”라는 제목의 발표를 했다. 당시 발표를 요약하면, ‘메갈리아’에서의 ‘게이 논쟁’은 단일한 피억압 집단으로서 여성 정체성을 재현하고 확인하기 위해 ‘게이’를 남성 범주로 단일화하였고, 여성을 일반화/대상화하는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한 미러링으로서 메갈리아에서의 게이 혐오적 표현이 정당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의 참여자와 쟁점의 구도가 반드시 메갈리아 여성 vs 게이 남성의 구도로 전개되었는지는 단정지을 수 없지만, 이 논쟁의 과정에서 ‘메갈리안 9000여명이 워마드로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파급력 있는 사건으로 다뤄지는 것으로 미루어, 워마드에서 보여지는 ‘게이아웃팅 프로젝트’니, ‘크로스드레서는 정신병’이니(워마드 카페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이 어구를 그대로 입력해야한다)하는 것들이 어느 정도 동질적인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거점과 성차 전략을 바탕으로 한 현상이라는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토론회는 이것이 극소수의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일어나는 일탈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면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가지는 필연적인 동학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실천적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자리는 지난 2016년의 토론회의 연장선상에 있다. *[참고] 무지개행동 홈페이지에서 2016년 제8회 LGBTI 인권포럼 자료집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
‘워마드’발 크로스드레서/트랜스젠더 혐오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지고 있다. ‘게이 아웃팅’에 이어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 아웃팅’으로 진화한 이 움직임으로 인해, 한 트랜스젠더 온라인카페가 한동안 새로운 가입자를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논의를 위해, 나의 몇 가지 가정에 비추어 질문을 던져본다. ‘워마드’식 페미니즘을 ‘분리주의 페미니즘’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혐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혐오라면 게이,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 중 어떤 지점인가, 아니면 그 모두인가?
‘분리주의’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차원의 ‘분리’를 꾀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 레즈비언 분리주의는 레즈비언을 ‘초’여성(진정한 의미의 자매애를 실현하고 억압에 맞서는 실천을 하는 진짜 여성)으로 정의하면서, 남성/게이남성/이성애자여성 등 여러 집단과 경합하고 여러 억압의 축에 맞서는 입장성을 표방했다. 한국 1990년대 ‘영페미니스트’ 운동의 분리주의적 면모는 ‘여성주의 문제’를 주변화하는 기존 학생사회의 좌파/사회주의적 운동론 및 학생회 조직으로부터의 분리, 노동-경제-분배라는 거대담론 안에서는 ‘문화적인 것’,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일상의 문제와 다양한 성적 실천에 대한 조명을 수반했다. 물론, ‘생물학적 여성이 대다수’인 ‘편하고 자유로운 판타지 공간’, 총여학생회 및 여성모임 등의 전략적 ‘여성’ 거점이 있었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편하고 자유로운 판타지 공간’이 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성애중심성과 성적 다양성에 대한 논쟁 등 내부의 차이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였다. ‘차이연대’, ‘다름으로 닯은 여성연대’ 등 2000년대 여성주의 운동을 ‘차이의 여성주의’라고 분석하고 있는 견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흐름에서 남성의 크로스드레싱에 대한 비판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1990년대를 시작으로 활성화된 대학 내 반성폭력운동의 흐름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새터 등 엠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남성들의 여장을 (환경적)성폭력으로 문제시 했다. 많은 대학들의 반성폭력 내규에 새터에서의 ‘여장’이 예시되어 있을 정도로 ‘여장’은 빈번하게 행해져왔다. ‘미인대회’ 또는 ‘추녀대회’, ‘여자인 척’하다가 다리 털을 밀거나 ‘고추’를 만지는 등, 남자들의 ‘여자 흉내’는 손쉬운 웃음 유발 아이템이었다.(그 반대는 웃기지도 않았고, 빈번하지도 않았다.) 이를 환경적 성폭력으로 문제시한 것에는 그것이 트랜스젠더 여성을 가짜 여성이라 비꼬는 것에 대한 분노와 남성의 여장이란 여성을 손쉽게 희롱하기 위해 여성의 ‘대역’을 등장시키는 장치일뿐이라는 비판이 혼재되어 있었다.
오늘날 워마드식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그리고 여성으로 살고 있는)여성이라는 범주 이외의 억압의 맥락들을 의도적으로/전략적으로 삭제한다. ‘여성’으로서의 단일한 입장성 만들기의 일환으로, 다양한 성소수자 또는 성적 실천들은 ‘여성인권’이 우선이며 미션임을 재확인하는 경계로 활용되기 쉽다. 성소수자, 젠더퀴어적 존재들, 패러디들이 ‘비-여성’이라는 잔여적 범주로 단일화할 우려가 있다. ‘차이’를 챙기는 것은 해일 앞에서 조개줍는 격이다.
둘째로, 이는 워마드식 분리주의적 관점에서 규정된 비-여성 및 그들의 권리 문제가 분리주의 페미니즘 운동의 구성원 또는 운동의 내용이 될 수 없다(챙기지 않는다)는 배제적 논리뿐만은 아니다. 게이, 비수술 트랜스젠더 여성, 크로스드레서에 대해 ‘남성임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서’, ‘여자도 아닌 게’ 여자인 척하려고/여성이 되려고/여성에 끼려고 하는 것은 부당하며 그들이 수행하는 여성성은 남성의 시선에서 대상화된 여성을 재현하고 강화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다종다양한 성적 주체들은 남성으로 환원되어 여성혐오 재생산에 공모하는 자들로서, 페미니스트의 적극적인 공격이 필요한 대상으로 위치된다. 이는 가부장제 및 이성애주의, 성별이분법을 넘어서려는 퀴어정치의 “젠더-위반” 관점과 억압의 축으로서의 남/녀에 대한 강력한 고찰을 요청하는 분리주의 페미니즘 정치의 “여성-대상화” 관점의 싸움이 필요한 지점이다.
셋째로, 워마드 게시판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ㅈㅅㅂㅈ’ 관련 글들은 워마드의 주요한 액티비즘(낙태죄 반대, 반성매매 등과 비교하여)에 비껴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이,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에 대한 내부 담론들은 ‘액티비즘’이나 ‘의제’로 위치되기 보다는 분리주의의 의제와 입장성을 확고히 하는 조리돌림의 장으로서, ‘비하적 농담’이 통하는(어떤 점에서 ‘우리’라는 감각은 무의식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상식의 공동체’일 수 있다.) 공동체성의 한 유대/리트머스로 기능한다. 일본의 극우 혐한시위에 등장한 짤(누드인 두 명의 남성이 트럭을 타고 시위하는 뒷모습 사진)이 한국 퀴어문화축제의 한 장면인냥 ‘가짜뉴스’가 생산, 유포되거나, 국민일보 1면에 등장한 와병중인 ‘탈동성애자’의 고백이 인용되는 것은 이러한 ‘농담’의 장이 실제로 보수개신교의 성소수자 ‘혐오’와 구분되기 어려운 지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로, 이러한 분리주의가 수행하는 ‘남성에 대한 일반화’가 실제로 많은 남성들을 페미니즘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다른 남성’이 되고자하는 사람들이 워마드나 메갈리아를 지지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페미니즘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고 ‘신경쓰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다 똑같아’라는 입장이 ‘남자라고 다 같지는 않다’는 입장을 활성화한다. 일정 정도 페미니즘이 규범화되었다는 대단하고도, 위험한 징후이다.
운동의 여러가지 결, 각각의 의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쉽지 않은 부분은 여성성/남성성을 둘러싼 두 번째 쟁점 – 젠더-위반 vs 여성-대상화(정형화) 관점 간의 경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다. 오로지 젠더트러블은 생물학적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인가? 여성의 여성성과 남성의 여성성, 반대로 여성의 남성성과 남성의 남성성이란 것이 각각 우리가 우려하는 위험한 상관관계가 있는가.(예컨대, 게이의 여성성과 여성의 여성성이 관계가 있는가, 레즈비언 섹스에서의 ‘딜도’ 사용이 남성성의 재현이자 이성애 관계의 모방이기 때문에 문제인가, 부치나 트랜스젠더 남성이 남성성을 ‘택했다’는 것이 여성을 배반하는 증거로 읽혀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경험과 이론이 탐구되고 있다.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트랜스’ 쟁점 사이의 ‘돌파’라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과제이다.
뒤에 이어질 <페미니즘 역사/철학에서의 트랜스 쟁점>, <‘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퀴어페미니즘>은 그 돌파를 위한 자원으로서 의미가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