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2017.2.24~26)
세션1-1.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
2017.2.25 오전10:00~12:00
‘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퀴어페미니즘
나기 (언니네트워크)
여전히, 당연한 ‘우리’는 없다
“법리적으로 검토해 봤을 때, 최고 규범인 헌법 제11조 및 제36조에 따른 ‘양성’이라는 용어가 좀 더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헌법에서 양성평등 이념은 도출할 수 있지만 성평등 이념을 도출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3의 성이라든지, 성적 지향이라든지, 여러 가지 부분에 있어서 사실은 우리 법이 그렇게 온정적이지는 않습니다.”
(김용화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
“성평등은 저는 아직 너무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남성, 여성 뚜렷하게 양성에 대한 얘기를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정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 2014년 19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여성발전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에 대한 공청회 중
“양성평등은 말 그대로 양성에 대한 평등을 얘기한다.”, “성평등은 성적소수자에 대한 완벽한 평등을 가치로 한다.”, “동성애자, 양성애자 허용 권리 주장은 아직까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
– 2016년 여성가족부 국정감사 중
“‘사람이 먼저인 세상’은 바로 ‘성평등한 세상’” “저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성별차이로 인해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다. 성평등은 인권의 핵심 가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 2017년 2월 16일 대한민국바로세우기 제7차 포럼 중
성소수자와 페미니즘을 연결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페이스북나 트위터의 타임라인만 보고 있으면 내 세상은 퀴어 페미니스트만 살고 있는 느낌이지만 ‘성평등’을 둘러싼 지형과 지금 당장 나에게 퀴어 페미니스트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보자고 하면 그것이 무엇인가- 퀴어와 페미니즘은 정말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싶은 마음이 든다.
지금, ‘성평등’이 이야기되고 있는 지형은 복잡하다. “성소수자 인권 없이는 성평등도 없습니다”를 줄기차게 외치고 성교육 표준안, 대전시 성평등조례 개정 등의 현안에 대응해 여성단체들과 성소수자 인권을 삭제하지 않는 성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한 장면 장면들이 쌓여온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우리’가 같은 성평등을 이야기한 것이 맞는지 질문하고 싶은 순간들이 다시, 자주, 찾아온다.
<성소수자 인권‘도’ 챙기는 페미니즘 = 성평등>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성소수자 혐오세력은 ‘성평등’이란 단어만 들어가면 성소수자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모든 곳에서 ‘성평등’이라는 말을 삭제하기 위해 전방위로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와중에 주류 여성운동계는 남성과 여성, 이원-젠더의 뚜렷한 강조가 있어야 여성문제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고 남성, 여성 문제와는 전혀 동떨어진 초월적인 공간에 초월적인 문제들로 구성된 성소수자인권이 있어 그것을 포괄하면 성평등이 되고 포괄하지 않으면 양성평등이 된다고 생각하는 <성평등보단 양성평등>론을 아직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나마 <성소수자‘도’ 챙기는 페미니즘 = 성평등>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정도라고 해야할까. 이 시점에, 이 국면에 ‘성평등’이라는 말을 앞에 걸고 ‘젠더 폭력’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정책 발표를 하면서도 성소수자가 왜 성평등 안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분도 계시니 성평등이라는 말과 젠더 폭력이라는 말도 잃을 판이다.
지난주 문재인 전 대표의 성평등 정책 발표 자리에서 들렸던 “나중에”라는 말. 장애여성공감과 한국이주여성센터의 연대의 발언 이외에는 ‘나중에’라는 말에 동의하는 박수소리만이 남았을 때, 이것은 단순히 ‘시기’에 대한 동의로 읽히지 않는다. 뚜렷한 양성 구분을 강조하는 것이 성차별의 문제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양)성평등으로 가는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것,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더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의 해결 속도를 늦출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무엇이 가장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인지 느끼는 것은 여성이라면 다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동의. 다시 한 번 여성주의운동이 아닌 여성운동이 되는 순간, 성소수자는 몰-젠더적인 존재로 증발한다.
여성운동과 여성주의운동
이미 10여년 전에 영페미니스트들 – 그 시대의 ‘새로운 페미니스트’라고 불리었던 – 은 기존의 주류 여성운동을 비판하면서 ‘여성’이라는 단일화된 집단을 상정하는 것이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을 삭제할 뿐 아니라 (이성애중심주의와 긴밀하게 얽혀있는) 이원-젠더, 이원-섹스의 공고한 체계가 성차별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해왔다. 동질적인 여성정체성이 아니라 이원-젠더, 이원-섹스 체계 속에서 ‘여성’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차별경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고민이 페미니즘 정치가 되어야 한다는 영페미니스트운동은 <‘여성운동’이 아니라 ‘여성주의운동’>이라고 자기 정치를 정체화하며 소수자성과 페미니즘을 연결시켰다.
이러한 페미니즘 정치에 동의하는 ‘우리’를 만들어온 10여년의 시간동안 취한 하나의 전략은 주류 여성운동과의 ‘분리’였다. 페미니즘 정치 간의 부딪힘을 통한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최우선은 아니었기에 여성운동 판이 천지개벽할 변화를 보인다는 게 오히려 더 놀라울 일이라 지금의 현실이 심각하게 새삼스럽거나 그렇지는 않다. (물론 울분은 있지만) 오히려 새삼스러운 지점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015년 이후로 등장한 ‘새로운 페미니스트’세력 중에서 “다시 ‘여성’운동”이라는 프레임이 부상하고 있는 지점이다.
워마드 발 분리주의로 일컬어지는 “보지만 챙긴다”, “여성주의 아니고 남혐운동/여성운동”이라는 프레임에서 여성 성소수자는 같은 ‘여성’으로, 운동의 주체로 호명되기는 한다. 기존의 여성운동이 성소수자를 모두 비-여성으로, 성소수자 이슈를 몰-젠더적인 것으로 상정했다면 여성 성소수자가 운동의 주체로 포섭되고 여성 성소수자의 이슈 역시 여성운동의 이슈로 인정된다. 그러나 무엇인 운동의 내용이고 누가 운동의 주체인가에 대한 워마드식 여성운동의 경계는 ‘태어날 때부터’ 보지와 자궁을 가지고 여성으로서 남성젠더권력에 의한 피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기준으로 여성과 비-여성의 경계를 만들어가며 이원-젠더, 이원-섹스 체계 속에서 경계가 형성되고 있다.
페니스는 남성젠더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페니스를 가진 자들의 소수자성을 ‘챙기는 것’은 여성혐오 해결이라는 최우선의 목표 아래에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가운데 다른 여성 성소수자와 달리 트랜스젠더(MTF)는 페미니즘 주체가 아닌 여성혐오의 ‘가해자’ 위치로서 워마드의 ‘우리’에서 축출된다.
트랜스혐오를 전략이라고 말하기까지
[여성혐오적인 호칭들에 대한 일말의 자정노력도 없이 년년 대면서 뽈록이니 젠신병자니 뭐니 나불대던 걸 꼬투리 잡힌 것 같군요. 이 기회가 자정의 신호탄이 되면 좋겠습니다] 2015년 12월 8일 트위터
[여자들 입에만 재갈 물리면 좋아요? 똥꼬충들은 가위충 젠신병자 트미네이터 시헤녀 시스 헤테로 권력 증오해 이래도 되고?] 2016년 6월 7일 트위터
모든 운동은 싸움의 대상이 같다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 대상을 같게 설정하고 있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확인하면서 타자와의 분리를 요구한다. 메갈리아에서 워마드로 넘어오던 시기 – 메갈리아에서 게이 커뮤니티의 남성 젠더 권력을 문제 삼으며 게이를 한남으로 호명했을 즈음 젠신병자는 게이의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말로 지적되었다. 트랜스젠더는 남성젠더권력의 피해자로 위치 지어졌으며 여성 성소수자들 중 하나로 메길리아-워마드(초기)의 ‘우리’ 안에 속해있었다.
‘우리’를 확인하는 피해의 언어는 이후 CD(크로스드레서)가 재현하는 여성이미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며 ‘우리’에서 축출된 ‘한남’ 트랜스젠더를 공격하는 언어로 바뀌었다. CD뿐 아니라 트랜스젠더(MTF)의 젠더수행이 곧 <전통적인 남성시각에서 본 여성 이미지 강화 = 코르셋>으로 해석되면서 트랜스젠더(MTF)는 비-여성=한남으로, 여성에게 피해를 입히는 존재로 재위치 지어졌다. 워마드 안에서 트랜스젠더(MTF)는 여성을 남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당하는 위치로 재현하면서 정작 본인은 남성적 신체를 가지고 강간당하지 않을 수 있는- 피해와 무관한 존재, 수술로 제거되지 않는 한 언제든 여성을 ‘fucking’할 수 있는 페니스를 가진 존재로 일반화되며 생물학적 ‘남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끊임없이 남성으로 범주화된다. 게이의 여성혐오를 지적하며 여성혐오의 해결을 위해서 게이혐오적 용어가 용납되었듯이 트랜스혐오적 용어도 여성혐오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으로 용인된다.
퀴어-페미니즘
경계 없는 페미니즘은 없다. 이 세상 모두가 가부장제와 이성애중심주의와 이원-젠더, 이원-섹스의 구조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피해자’다- 라고 해도 개별자들은 젠더권력에 차이가 있고 우리가 경험하는 성차별에는 실체 있는 얼굴들이 있다. 영페미니스트운동에서도, 언니네트워크의 여성주의운동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 여성됨의 경험을 드러내는 목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하기 위해 생물학적 남성에게 경계 세우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하지만 그 경계를 어디에 세우는가에 ‘우리’의 페미니즘이 무엇인가-가 핵심적으로 드러난다.
워마드식 분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할 때 그 비판은 트랜스혐오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인가, 트랜스젠더(MTF) ‘도’ 챙기는 여성주의가 아니라서인가? 내가 모두를 두루두루 챙기는, 단 하나의 소수성도 놓치면 안되는 오지라퍼 페미니스트라서 비판하는 것인가?
이성애중심주의와 분리될 수 없는 이원-젠더, 이원-섹스 체계 속에서 이성애자 남성의 페니스에 의해 fucking 당하고 임신/출산의 재생산으로 이어져야 하는 보지이자 자궁으로서 여성의 몸만이 ‘진짜’ 여성의 몸으로 정의될 때 이성애중심주의와 이원-젠더, 이원-섹스 체계에 균열을 내지 않고서 여성혐오가 생산/재생산되는 기제를 없앨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트랜스혐오용어라서가 아니라, 트랜스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이원-젠더, 이원-섹스를 공고히 하는 말과 운동이 여성혐오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페니스에서 남성젠더를 분리해내는 것, 보지와 자궁에서 여성젠더를 분리해내는 것- 페니스를 가진 자들에 의한 압도적인 여성폭력 사이에서 페니스에서 남성젠더를 떨어뜨린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균열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퀴어-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퀴페…참 어렵구나…)
보지와 자궁으로부터 분리되고 싶은 ‘분리주의자’의 소고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트랜스젠더만일까? 모든 생물학적 여성의 몸을 이성애 관계를 통한 재생산에 복무해야하는 몸으로 환원하고 통제하는 것에 반대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자궁을 가지고 살아오긴 했으니까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를 사용할 수는 있다. 생리불순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생리 – 몸의 변화를 그다지 가져오지 않는-를 경험할 때마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비껴난 젠더수행과 몸이 조응하는 것에 기뻐하며 내 몸이 ‘(이성애자)여성의 몸’으로서의 기대를 매번 배반하는 것을 즐겼던 사람으로서 생식기관은 딱히 내 것이었던 적이 없다. 끊임없이 (이성애)결혼, 임신과 출산을 위한 기관으로 보지와 자궁이 언급될 때 오히려 최대한 그 기관들 자체에서 내 정체성을 분리하고 싶었던 사람에게 생물학적인 몸을 기준으로 – 보지와 자궁으로 – 같은 여성으로 취급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여성 성소수자들의 몸에 대한 인식은 보지와 자궁을 가진 ‘같은’ 몸이라고 ‘같은’ 인식으로 구성되어 왔을까?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보다도 ‘같은’ 몸이라고 상상되는 것에 균열을 내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이 나에게 더 와 닿는 페미니즘이라면 이것은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운동을 파괴하는 것인가?
‘여자인 척 하는’ / ‘여자도 아닌 것 같은’ 트랜스젠더가 페니스를 가진 몸으로 여자화장실에 들어와서 ‘동질적인’ 여성공간을 침범한다는 의심을 받을 때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등 여성과 성애적 ‘긴장관계’에 있을 수 있는 존재들이 이미 여자 화장실을 ‘동질적’이지 않은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지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