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나기
부당한 말을 한 상대에게 곧바로 받아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남는 울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말은 내 안에 남아 세수를 할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출근하는 길에도 부지불식간에 다시 내 머리를 차지한다. 수십 번- 머릿속으로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보면서 다음번에 비슷한 말이 들어오면 이렇게 말해야지, 저렇게 받아 쳐야지 하는 상상을 해본 경험이 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여성에 대한 범죄가 보도될 때, 정말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상상을 해본 것도 나만의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세상이 늘 나에게 ‘너도 강간이나 여성혐오로 인한 살인이나 폭행을 당할 수 있어. 조심해.’라는 말을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하기 때문에 나는 ‘잠재적’ 피해자의 자리에서 늘 살 궁리를 한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비욘세라도 현실에선 춤도 노래도 안 되고, 심지어는 매주 합창연습에 나가는데도 합창이 잘 안 되는 마당에 연습 한 번 해보지 않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몸이 제대로 움직일 리 만무하다.
처음으로 자기방어 수업을 들었던 것은 10여년 전이었다. 언니네트워크의 페미니즘 캠프에서 아침나절 진행되었던 그 수업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난데없이 여러 가지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효과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법– 그것은 무림고수처럼 상대방을 업어 치고 메쳐서 완벽하게 ‘무찌르는’ 것이 아니었다. 힘과 체격의 차이가 있을 때 ‘겨우’ 한순간의 틈을 벌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던 자기방어 수업은 통곡과 함께 끝났다.
시작은 분명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머릿속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강사 바로 앞에 서있었다. 하지만 가해자 역할을 맡은 강사를 대면해서 실제로 대항을 해보는 시범대상이 되니 얼어붙었던 거였다. 내가 누군가를 ‘친다’라는 것에 상대방이 얼마나 다칠지가 두렵고, 강사가 나를 제압하는 행위가 다른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괴롭고, 종국에는 강사가 나를 쳐다보는 것도 무서워져서 울다가 다른 사람의 수업기회까지 망친 채 끝나고 말았다.
넌 그런 거 필요없잖아
무서워서 울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의 외양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나를 여리여리하고 힘없는 사람으로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키가 큰 편이다. 수영선수였냐고 묻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어깨도 넓다. 힘도 약하지 않다. 남자애들과 악력 싸움을 하고 복도에서 추격전을 하는 게 내 학창시절이었고 나도 나를, 남도 나를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 오히려 내가 자기방어 같은 얘기를 하면 “넌 그런 거 필요없잖아. 얼굴이 무기잖아. 니 어깨로 한 대 치면 끝이잖아. 넌 힘세잖아. 넌 남자애같아 보여서 아무도 안 건드려.”라는 (매우 짜증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나를 지키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건 정말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위험에 처했을 때 나 자신을 지키는 자기방어를 훈련한 적은 없고, 수많은 시간동안 타인의 감정을 방어해주면서 내 행동을 통제하는데 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더 많이 훈련한 것이 더 빨리, 강하게 나오는 게 당연하다.
여전히 성폭력을 피해자의 어떤 특성이나 행동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쁘지 않으면, 몸매가 좋지 않으면, 옷을 야하게 입지 않으면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된 메시지를 내보낸다. 잘못된 통념은 피해를 당하는 순간에도 이것이 피해가 맞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지하철에서 옆자리 남성이 잠든 척하고 나를 교묘하게 만져대던 추행이 일어나던 그 순간에도 나는 ‘여성스럽지 않고’, ‘치마도 안입고 있는’ 나에게 일어나는 이 일이 정말 성추행이 맞는 걸까 의심하는 게 먼저였다. 성별, 외양, 나이, 장소를 불문하고 일어나는 일에 제대로 대응할 방법을 훈련할 기회를 차단해왔기 때문에 내 몸은 내 머릿속 시뮬레이션대로 즉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후에도 혹시 내가 괜히 지적해서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 그 다음이었다.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상대를 자극해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더 큰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수없이 들어온 탓에 우물쭈물거리다 상대가 내려버리는 게 끝이었다. 위험이 뒤에서, 옆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끼면서도 그 예민함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혹시 오해받았다고 기분나빠할까봐 눈을 돌려 확인하는 것조차도 못하는 상황. 정말 이것이 나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내가 힘이 없는 게 아닌데, 내 힘이 정말 나를 지키는 힘이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을 훈련할 ‘필요’가 있었다. 제대로 된 자기방어를.
아니야 안돼 그만해
폭력은 길거리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신매매, 택시기사에 의한 강간살인, 일면식도 없는 여성에 대한 폭력 등의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될 때 온 세상이 여성의 행동반경과 시간을 제약하고 광범위한 두려움이 재생산된다. 일면식 없는 사이에서의 랜덤한 폭력사건이 ‘안전’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도되지 않는, 혹은 사법정의를 구현하기 힘든 수많은 사건들이 집 안에서, 나에게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공간에서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 최근에 발표된 ‘2017년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상담통계 분석 – 성폭력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피해의 85%가 피해자와 아는 사람에 의해서 발생했다고 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살피게 되는 일은 가까운 관계일 때 더 심해진다. 물리적인 힘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얼마나 많은 다른 조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아니야 안돼 하지마”라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강하게 쳐내거나 걷어차거나 밀어내고 도망치기 어렵게 만드는지.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우회적인 거절의 말과 몸짓을 하기도 하고 상대방이 내 거절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서 상황을 악화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단호한 행동을 막기도 한다. 직장에서의 상하관계, 교육시스템 속에서 선생과 학생 관계, 평가자와 피평가자, 의존도가 다른 연애나 결혼 등 수많은 불균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내 행동에 따라 상대방이 내 삶의 조건을 한순간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역시 상대방의 감정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매게 되는 원인이다.
그래서, 자기방어수업을 다시 듣기 전에 했던 생각은 실제로 물리적인 힘을 강제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내가 저항할 수 없게 되는 관계의 조건들이 있는데 아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런 관계의 위치에 기반한 폭력에 자기방어기술이라는 게 소용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듣고 난 다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소용이 있다.’ 협상, 우회적으로 거절하기의 순간에도 신체적으로 나를 방어할 수 있는 자세, 말만 오가다가 갑자기 신체적 경계가 침범당하는 순간의 대처를 배우는 것만 아니라 내 마음에 ‘나’를 우선시 하고 스스로를 위한 안전의 경계벽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우리가 수많은 불평등한 조건들을 모조리 피해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에서의 불평등한 조건이 나에 대한 실질적인 폭력으로 변하는 순간에 대처하려면 자기를 지키는 법을 더 훈련해두어야 하지 않을까. 자기방어는 폭력의 순간에서 ‘당하지 않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폭력을 경험한 이후에도 내가 살게끔 나를 위해 하는 모든 일들, 신고, 상담, 도움 요청 그 모든 것들이 자기방어라는 선생님의 말도 매우 ‘소용 있었다.’
너의 변명거리가 아니라 나의 삶을 위한 자기방어
무엇이든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끌어가는 사람들은 자기방어훈련을 가지고도 “그러게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거절하면 성폭력 안당할 거 아니야”라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죽기로’ 저항하면 ‘절대’ 피해자가 될 리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완벽하고 명시적인 YES만이 동의를 의미한다고 사법체계에서의 성폭력 인지기준을 바꿔나가는 몇몇 나라에 비해 여전히 실제로 죽거나 죽을 만큼 저항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NO라고도 잘 안 받아들이는 한국의 상황에서 자기방어를 위한 훈련이 오인받을 가능성은 분명 있다.
저항의 유무나 저항의 강도가 성폭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이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자기방어의 관점에서 우리는 저항하기를 선택할 수도 저항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저항은 몸의 저항일 수도 있고 말의 저항일 수도 있다. 말은 거부일 수도 있고 협상일 수도 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거나 소리지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피해자를 탓하는 용도로써가 아니라 진심으로, 선택지를 늘리는 용도로써 자기방어가 이야기되기를 바란다. 자기방어를 훈련한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방어에 성공한다는 것도 아니다. 겨우, 방어력이 1 증가한 수준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무엇이라도 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수만 번 머릿속에서 돌려보면서 삶의 통제력을 되찾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회복의 도구로 자기방어가 도움이 되기를- 넓게 보고, 계속 움직이고, 위험에서 벗어나 삶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 본 연재는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스페이스살림 프로젝트 사___이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