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뽑
어렸을 때 본 호신술 책이 떠오른다. 간단한 선으로 그려진 일러스트는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뉘어 각 상황에 따라 어떻게 반격할 수 있을지 알려줬다. 급소를 알려주는 장은 몇 번씩 보면서 외우기도 했다. 명치라는 말도 아마 그 책에서 배우지 않았을까 싶다.
급소를 책으로 배웠습니다
그림 속 ‘피해자’ 여성은 뭔가 어색했다. 둥글둥글한 선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괴한의 낭심을 공격하는 일러스트에서는 손목이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어렸을 때도 저 공격이 과연 효과적일지 의심했던 기억이 있다. 저런 상황에서 과연 책 내용이 생각이 날까? 책에서 알려주는 상황이 지나고 나면, 나는 뭘 해야 하는 거지?
호신술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멀어지고, 그 자리를 자기방어와 셀프 디펜스가 채웠다. 협상이 내고가 되고 일벌레가 워커홀릭이 되는 시대적인 언어 흐름이었겠지만, 단순히 몸을 지킨다기보다 포괄적으로 나 자신을 지키겠다는 의미를 아우르는 단어로 바뀐다는 거겠지. 호신술 책에 끌렸던 아이는 자라 30대 여성이 되었고, 처음으로 자기방어 수업에 참여했다.
있는 힘을 다 해 노려보기
어렸을 때부터 (책으로) 배웠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누군가의 불알을 걷어차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적은 없다. 차고 싶었던 적은 좀 많긴 했다. 지하철에서 자꾸 자기 성기를 내 엉덩이에 비비적댔다거나, 지하철에서 잠든 여성의 가슴골을 게슴츠레 보던 놈들이 기억난다. 상상하니 매우 효과적으로 걷어찰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불알 한 쪽에 합의금 천만 원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통 크게 한 번 차고 천만 원 줘버릴까. 씨발이라는 욕도 너무 아까운 것들.
수업을 듣기 전 내가 이제까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꼬추를 비비던 놈한테는 어떤 대거리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했고(꼬추남은 내리는 척하면서 내리려던 사람 뒤에 가서 똑 같은 짓을 했다.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생각날 때마다 뒤로 넘어뜨려서 펌프처럼 밟는 상상을 한다), 게슴츠레남은 있는 힘을 다해 노려봤더니 눈치를 보고 스스로 자리를 피했다. 나와 같은 역에 내리길래 다쓴 힘을 또 써서 계속 노려보면서 내렸는데 황급히 도망가서 찾을 수 없었다. 집에 오는 내내 생각했다. 그 새끼 죽였어야 했는데.
이후에도 ‘있는 힘을 다해 노려보기’ 기술은 치마 속을 찍던 고딩남과, 어린 여성이 자기 차에서 과자를 먹었다고 손목을 붙들고 경찰서에 가자던 택시남 등에게 몇 번의 유효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몇은 자기가 잘못한 걸 아는지 자리를 피했고, 몇은 당황하면서도 나를 바라보았다. 세상 자신 있게 노려보면서도 공격 당할까 마음이 불안했다.
때로는 소프트하게 때로는 하드하게
첫 번째 주에 배운 부드러운 해결 방법(soft solution)은 내가 원했던 내용이었다. 말 그대로 치고 때리고 날려야 할 상황이 오기 전 부드럽게 대치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화난 상대 앞에서 팔을 펴고 손바닥을 내민다. 천천히 진정하라고 말한다. 이 행동은 상대방을 진정시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흥분한 나 자신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여차하면 진정하라고 내민 손으로 방어를 할 수도, 공격을 할 수도 있다. 주도권은 나에게 있었다.
두 번째 주에는 강력한 해결 방법(hard solution)을 배웠다. 가해자 역할의 선생님이 온 몸을 보호구로 감싸고 참가자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처음 해보는 공격에 모두들 정신 없이 무겁고 무서운 가해자(역할)를 밀어냈다. 생각보다 쉽고, 생각보다 어려웠다. 매 수업이 끝날 때마다 근육통이 찾아왔다. 욱신거렸지만 기분이 상쾌했다.
하지 않았던 일을 하면 적어도 하나의 데이터가 생긴다. 성공과 실패의 기록이 모여서 더 잘 대처하지 못해서 분한 마음과, 예상보다 자기 몸을 잘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동시에 배어들었다. 수업 전과 수업 후, 사람들은 조금 더 생기 있는 눈이 되었다.
나는 반격할 수 있는 사람
내 자리는 늘 약한 쪽이었다. 분위기가 싸한 사람이 앞에 있다 싶으면 슬쩍 피했다. 스스로 먼저 다른 남성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크게 당한 적은 없지만 늘 석연찮았다. 노려보기 이상의 무언가, 불알펌프밟기까지는 아니어도 더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게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2주 간의 수업으로 그런 방법을 배웠나? 그럴 리가. 나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은 잠재적 가해자에게 내가 먼저 공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완전한 가해자와 완전한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는 내가 충분히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피해자의 자리를 벗어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안다는 게, 실제로 써먹을 일이 없더라도 조금 더 자신 있게 노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수업을 진행한 최하란 선생님은 어떠한 해결 방법으로라도 곤란한 상황을 벗어났다면 잘한 거라고 말씀하셨다. 노려보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도, 지금 살아 있는 것도 모두 잘한 일이다. 싫어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피해자의 자리에서 보낼 것이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여러 방안을 배웠던 경험은, 무엇보다 우리의 눈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우리는 너희를 지켜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잘하는 일이다. 책으로 읽어서가 아니라, 직접 겪어봐서 안다.
* 수업을 진행해주신 스쿨오브무브먼트 최하란, 정건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본 연재는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스페이스살림 프로젝트 사___이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