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운동 하루이틀하고 말 것인가라는 의미와 비혼운동의 어제와 오늘 혹은 오늘과 내일의 의미를 가진 아카이브 꼭지 타이틀입니다. 호주제 폐지, 영페미니스트운동, 장애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차별금지법, 가족구성권운동의 자장 안에서 등장하고 확장되고 변화해 온 비혼운동의 맥락을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자 합니다.비혼원투데이는,
PLAY B 비혼의 역사를 재생하다 1편 : 비혼여성축제
난새 – 언니네트워크 전 활동가 / 2007년,2008년 비혼여성축제의 기획단
-인터뷰 진행 : 나기, 영희
-영상 촬영/편집 : 영희
[인터뷰 전문]
언니네트워크는,
1990년대 중후반에 나타난 영페미니스트, 소위 “영” 페미니스트 그룹, 사람들이 만든 단체이거든요. 그때 그 영페미니스트 들한테 정말 중요했던 게, 기존에 어떤 여성의 생애주기와는 다른 방식의 자신의 삶을 꾸리는 것이었고 그게 이제 원가족으로부터의 독립, 더 간절하게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했던 것 같아요 그때
거기에서 사실은 비혼이 그때부터 되게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던거 같아요. 그 그룹들의 운동에서. 그걸 언니네트워크란 단체가 비혼의제를 운동으로 삼았을 때 좀 더 사회에 이제 비혼이라는 단어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알려보자 라는 걸로 비혼여성축제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1회 비혼여성축제는 2007년에, 3.8.여성의날을 맞이해서 3월달에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있었고, 2회 비혼여성축제는 2008년에 2회 비혼여성축제는 2008년에, 좀더 규모를 많이, 저희 딴에는 키워서 홍대 롤링홀이라는 공간에서 진행을 했습니다.
1회 때 재미있었던 거는 오신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한 100여 분 정도였을텐데 날씨가 굉장히 추웠어요. 3월초여서 그날 특히 막 겨울처럼 날씨가 추웠는데, 사람들이 안 가는 거예요. 두 시간 세 시간이 넘는 행사였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마지막까지 굉장히 많은 분들이 남아 있었던 게 기획단으로서는 엄청 감동적인 일이었구요.
2회 비혼여성축제는 한 200-300분 이상은 참여를 하셨던 것 같아요. 프로그램도 굉장히 다양했고 기획단들도 엄청 저희가 오래 공을 들여서 준비를 했었습니다.
그 비혼식을 실제로 한 분은 다섯 분이었지만,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비혼식을 치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고 싶었고, 그래서 함께 쓴 선언문을 읽는 것. 주례 한 명이 와서, 뭐 행복하게 잘 살아라가 아니라, 내가 내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하려고 비혼선언문을 만들어서 낭독을 하고, 그거를 또 노래도 만들어서 떼창도 했습니다. (웃음) 축하공연도 아주 빠방하게 많이 준비를 했고 피로연도 하고, 진행하고, 그렇게.
지금은 그래도 ‘비혼’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신문에서도 보고 티비에서도 보고 좀 익숙해져 계시겠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비혼이라고 하면 대체 알아들으시는 분들이 없고, 설명을 한바닥씩 했어야 됐거든요. 그래도 이해를 못하셨어요.
그래서 별로, 사실은 생각만큼 뜨겁지 않았습니다. 반응이. 근데 재밌었던 거는 그런 건데, 저희가 기사를 보내잖아요. 그러면 그거를 그 기자분이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연락이 오는 거예요.
‘재밌네’ 하고 연락이 오시는데, 오셨는데, 그때 저희가 좀 당황햇던 건 뭐였냐면,
저희 기획단이, 그 당시 언니네트워크 활동가들이 전부다 이십대 후반? 제가 이십대 후반, 서른을 갓 넘었었고, 저희 사무국장이나 뭐 활동가 친구들이 전부 다 이십대 초중반이었어요. 그래서 그 나이를 듣고 이 기자분들이나 아님 방송국의 작가 분들께서 매우 실망을 하시며 ‘니네는 아직 더 살아야 된다’ (웃음) ‘너네가 벌써 비혼을 이야기 할 그럴 그 깜냥이 아니다’ 이러시는 분들 되게 많았어요.
비혼을 선택한다에서 좀 더 나눠서 이야기를 짚어야 되는거는 사실 선택이라는게 내가 살면서 이 세상에서 내가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할 때 그냥 오로지 100% 나의 의지로 집었을 때만 그걸 선택이라고 하는 거라면 사실 그런 선택은 사실 세상에 없죠.
저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내가 다르게 살고 싶었던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다르게 살고 싶은 욕망을 어느 방향을 끌고 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동성결혼 운동을 할 수도 있었거든요. 동성결혼을 하면 결혼식을 하면 돈을 내겠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제가 다니던 단체에서 진보적인 단체였기 때문에 동성결혼식만 하면 너에게 결혼 휴가도 주겠다. 부조도 하겠다 라고 했지만 저는 그거를 뿌리치고 비혼식이라는 행사를 기획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저한테는 선택이죠.
제가 페미니스트가 된 것. 제가 여성주의 운동을 하게 된 핵심들의 단어에 그게 있었던 것 같아요. 언니네트워크가 제일 맞아 떨어졌던 것 같고. 그 하나가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결혼에서 여성을 드러내는 거였어요. 결혼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가족에서 딸이나 엄마의 위치가 아닌 다른 삶으로 사는게 저한테는 중요했기 때문에 저한테는 그래서 비혼이라는 삶이 저한테 핵심적인 의제였던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삶에서도. 그러고 그게 저의 페미니즘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