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운동 하루이틀하고 말 것인가라는 의미와 비혼운동의 어제와 오늘 혹은 오늘과 내일의 의미를 가진 아카이브 꼭지 타이틀입니다. 호주제 폐지, 영페미니스트운동, 장애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차별금지법, 가족구성권운동의 자장 안에서 등장하고 확장되고 변화해 온 비혼운동의 맥락을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자 합니다.비혼원투데이는,
PLAY B 비혼의 역사를 재생하다 3편 : 비혼유랑단의 인연
비비 – 전주 비혼여성공동체 비혼들의 비행.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협동조합 운영
-인터뷰 진행 : 나기, 영희
-영상 촬영/편집 : 영희
[인터뷰 전문]
비비는 ‘비혼들의 비행’의 준말이구요, 2003년도에 소모임으로 시작해서 2006년도에는 ‘우리가 비혼여성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 않냐?’ 하면서 공부도 하고 같이 공동체로서의 전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2010년 정도에는 조금 더 공식적이고 우리에게 걸맞은 옷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협동조합을 고민하게 되었고, 2016년에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협동조합이라는 긴 풀네임을 가진 공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지금 3년되었네요. 2019년 현재까지 상근활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김란이입니다.
2010년도에 공간비비를 마련할 때 참여를 하게 되었고, 지금 협동조합까지 상근활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봄봄입니다.
30대, 20대 후반 이후의 여성들은 전부다 결혼한 모델로서 있기 때문에 결혼한 삶이 아니고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았을 때는 도대체 어떤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리고 너는 늙으면 누가 보살펴주니 뭐 이런 얘기들을 흔하게 되게 많이 듣는데. 계속해서 내가 결혼하지 않음이 나의 모자란 것과 부족한 것과 자꾸 이런 것들로 얘기를 당하니까 우리는 우리로서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모임을 만들면서 우리끼리 우리의 삶 자체에만 주목할 수 있고, 우리의 삶 자체를 응원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이 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편안하게 비혼이라고 하는 자기의 상태, 또는 정체성을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 그러면서 어떤 비혼 여성들의 풀을 좀 더 키워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면 어떤 비혼들이 여기에 올 수 있게 해야 할까, 대상을 고민하다보니까 각각 세대별로의 고민이 다를 수 있다 라고 하는 거. 그래서 20대, 30대, 40대로 나눠서 진행을 해봤는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20대의 고민, 30대의 고민, 40대의 고민이 어디에 있다는 걸 조금 파악했던 것 같아요.
20대는 독립에 대한 고민이 컸더라구요. 집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가 없고 이런 것들이 있었어요. 독립이라는 키워드가 하나 있었고. 30대는 직장을 다니면서 자기의 좀 더 삶을 풍요롭게 즐기고 싶은 거예요. 그것들을 어떻게 풍요롭게 즐길 것인가, 비혼이라는 낙인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런 거였어요. 40대는 노화와 같이 오더라구요 고민이. 그리고 또 하나가 온 게 부모돌봄과 관련된 것들이고, 또 하나가 아픈 사람, 3,40대에 암에 걸리거나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그 아픈 사람들이 또 다시 비혼으로서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데 있어서 불안과 두려움들이 있었어요.
그것을 연이어서 올해 쭉 사업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독립이라고 하는 키워드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잡아서 주거독립 사례들을 발표했고 이번주 토요일에 컨설팅, ‘ 그래, 집을 한 번 구해줘 보마’ 이런 야심찬 기획을 가지고 ‘구해줘 홈즈 전주’를 마련했구요.
비비로서는 비비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비비는 17년이 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이가 다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여성노인모임공동체 관련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제가 블로그를 찾아봤더니 2010년 8월 20일에 ‘비혼유랑단 오다’ 이렇게 제목이 되어 있더라구요. 그 전에 저희가 오이오감의 영화 ‘비혼비행’에 나왔는데 그거를 보고 알게 되서 언니네트워크와 연분홍치마가 여기 오고 싶다 해서 이제 왔었구요, 그 때 낯설고 어색하게 이렇게 있었다라는 에피소드만 적어 있었더라구요. 그런데 이제 그 때 계기로 2011년 7월에 ‘비혼PT나이트를 가다’에 저희가 참여했었거든요. 비혼PT나이트. 다양한 비혼이 있다라는 것을 더 훨씬 체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구요. 공감되는 지점도 잘 캐치하고 이런 걸 많이 느꼈어요.
사실 저는 비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뭐랄까 내가 선택했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한편으로는 투쟁과정이었고, 저는 저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을 만드는 과정이었고 비혼으로 사는 것이. 그리고 지금은 그 덕분에 비혼이 정상인 사회에 살고 있고. 왜냐면 주거공간이거나 저희를 알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비혼인 거예요. 그래서 비혼여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에 살아간다는 게 혜택인 것 같아요.
비혼이 처음엔 아마 좀 거추장스러운 지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얘기해야하잖아요.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계속 얘기해야하니까 아무리 설명해도 ‘그건 아니거든’ 계속 해야 되니까. 그랬는데 그게 어느 지점에 왔을 때는 그냥 편한 티셔츠 같이 일상의 지점에 이르게 된 과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아마 그렇게 느끼게 된 지점에는 생활공동체라는 게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구요. 한 편으로는 지금도 명절에 새해인사를 하면 시집가라는 얘기를 들어요. 하지만 웃어넘기는 것이죠.
비비가 아니었다면 나는 초라한 개인이 되어 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고군분투하는 개인이 되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저는 그냥 개인이기도 하지만 비비이기도 해서 훨씬 더 힘 센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