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29일
언니네 채널[넷] 특집 78호 ‘가족주의보’
작성자: 니나
해당 글은 아카이브 자료 공유 동의를 기다리는 있는 글로, 작성자의 허락을 구한 뒤 공개될 예정입니다.
혹시 언니네트워크의 연락을 받지 못하셨다면 unni@unninetwork.net 으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성자: 백영경
지난 11월 21일 통계청은 2005년 4814만 명이었던 대한민국 인구가 2019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2050년에는 4234만 명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장래 인구 추계를 발표하였다. 이를 보도하던 9시 뉴스 앵커는 “대한민국 인구가 결국 5천만 명을 넘기 못하고 감소하게 된다고 합니다”라며 비통한 목소리로 이 소식을 전하였다. 같은 날 인구 대국인 인도와 중국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합쳐지는 경우 한국 경제의 미래가 얼마나 위협받는가라는 기사가 함께 보도되었고, 인구학회는 이미 2954년에 한반도에 인구가 한 명도 살지 않게 된다는 연구 용역 결과를 발표한 바 있기도 하다.
미래가 현재 급히 손쓰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상상력은 사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다. 인구 문제에서도 그 위협이 때로는 인구폭발이 되고, 때론 인구감소가 되지만, 미래는 언제나 위협에 처해 있다고 한다. 인구 감소가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는 전망 자체도 한국에 특별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은 저출산은 위기가 아님을 외쳐야 할지, 아니면 출산장려책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여성적 관점에서 저출산의 해법을 찾아야할지 놓고 혼란에 빠진 모습이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다양할 것이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위기가 누구의 위기인지를 물을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위기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구 문제의 구성 자체를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인구 위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떻게 바꿔가고 있는가,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 인구 위기가 상정하는 “우리”는 누구이고 어떤 종류의 경계를 생산해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인구 위기론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인구 문제가 정당이나 파벌, 정치적 입장을 초월한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현 상태를 유지하게 위해서는 출생률이 2.1이 되어야 하며, 1+1=1.08에 불과한 현 상황은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는 거 아니냐는 주장에 누가 쉽게 이의를 달겠는가. 그러나 인구 통계를 내고 문제를 찾아내서 관리를 하는 것은 제대로 된 근대국가라면 당연히 하는 일상적 행위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인구 문제는 사실 진단부터 처방과 개입까지, 즉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치적인 사안이다. 인구수를 집계하는 문제가 뭐 그리 정치적일 수 있으랴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단순히 인구를 셈할 때조차 시민권의 소유자/비소유자, 합법/비합법 체류자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가르게 된다.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혼인 여부, 성적 지향, 흡연 여부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정상/비정상을 가르게 되며, 출산율, 이혼율, 혼인율, 사망률, 수명, 인구 이동률 등등은 끝없이 정상/비정상의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보험사가 보험료를 산출할 때나 사고 보상을 할 때 확실히 알려주듯이 개인의 가치는 삶의 방식, 연령, 병력, 직업 등등에 따라 달리 평가된다. 다양한 가족을 인정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정부도 인정하지만, 출산율의 잣대로 보면 거의 모든 사회의 변화가 다 문제요 위기의 근원이 된다. 젊은 세대가 결혼을 안 하는 것도 문제, 결혼이 늦어지는 것도 문제, 동성애는 말할 것도 없이 문제, 가족의 해체도 출산율에 악영향을 주니 문제다. 혼인 연령이 늦어지는 것은 고령출산을 가져오기 때문에 불임을 늘리고 출산 자료를 줄이는 문제도 있지만, 또 임신과 출산 과정의 위험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보험재정에 부담을 가져오기 때문에 문제라고 하면서, 바람직한 행동과 문제 행동을 끝없이 분류하는 것이 인구 논의다.
또한 어떤 국가의 출산장려책도 누구의 출산을 장려하고 누구의 출산은 환영받지 못하는가라는 “재생산의 정치학”(the politics of reproduction)의 문제는 벗어날 수가 없다. 저출산에 대한 우려도 단지 낮은 출산율의 문제가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인구는 감소하는 반면 바람직하지 못한 인구는 증가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도 낮은 출산율에 대한 고민은, 지역 내에 거주하는 인구 자체가 감소한다거나 그로 인해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중동계 이민이 증가하는데 비해서 진짜 유럽인들이 감소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민 정책을 통해 안정된 인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미국에서도 라티노나 흑인들의 비율이 증가하고 백인이 감소한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며, 여전히 인구 감소보다는 인구 폭발이 국가의 의제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인도에서조차 무슬림 보다 낮은 힌두들의 출산율을 높이는 방안이 심각하게 논의된다. 저출산 담론의 민족 혹은 국가중심성이나 순혈주의에 대한 비판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지만, 민족이나 국가 혹은 지방자치체와 같은 특정한 다위를 떠나서 출산율 숫자 그 자체로 만은 우리에게 아무런 불안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저출산에 대응하는 방식 뿐만 아니라 저출산이라는 문제 설정 그 자체가 이미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사실 한국에서도 저출산에 대한 우려는 단지 출산율의 하락에 대한 우려만은 아니다. 이는 이주자들의 증가하는 현상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며, 결혼과 노동을 목적으로 한 “한국만 못한 나라”로부터 인구가 유입되는 한편,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한국인”들은 원정출산, 조기유학, 중산층 이민 등으로 유출되는데 대한 우려이기도 하다. 따라서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면서도, 결혼 이주를 통해 한국에 온 베트남이나 필리핀 여성들의 다산 경향을 끝없이 경계한다. 한국의 경우도, “국제결혼”을 저출산의 대안으로 타진하면서도 혼인 이주를 통해 한국에 온 베트남이나 필리핀 여성들의 다산 경향에 대해서는 우려가 존재한다. 국제결혼중계업체들은 생김새가 한국인과 다르지 않아 자녀를 낳아도 혼혈임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고 몽골 여성을 선전하고, 상대적으로 외모가 두드러지는 필리핀 여성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시부모로부터 인종적 편견과 혼혈아동에 대한 거부감에 따른 낙태를 요구받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 시민단체에서는 얼마 전 단체의 첫 사업으로 사만의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초기 임산부를 위한 배지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임산부의 보호라고 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일 같이 느껴지지만, 앞서 이야기 했다시피 모든 사람의 출산이 환영받는 것이 아닌 재생산의 정치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초기 임산부 뱃지를 당당히 달고 다니며 사회적 배려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생김새가 “정상의 한국인”과 눈에 띄게 다른 이주여성, 장애를 가진 여성, 10대 여성이 뱃지를 달고, 지하철에서 초기 임산부에게 자리를 내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심지어 행색만 몹시 남루해도 학력이 낮아보여도, 임산부 뱃지는 그들에게 보호와 배려의 상징이 아니라, 과연 저 사람이 애를 낳아 기를만한 사람인지에 관한 사회적 사찰과 감시, 개입의 상징이 되고 말 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의 출산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지, 그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맥락을 떠난 임산부에 대한 보호와 배려를 이야기 하는 것은 단지 현실성이 없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별과 배제의 기제로 전화될 수밖에 없다.
현재 일어나는 국제 결혼의 증가는 ‘한국가족’이 더 이상 한국 내에서 재생산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단지 ‘한국가족’의 재생산 문제, ‘한국가족’의 낮은 출산율의 문제로 읽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인구를 둘러썬 논란은 ‘한국가족’의 경계를 둘러싼 경합의 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베트남 여성은 유교권에 속하기 때문에 제사를 잘 지내고 자녀교육을 잘 시키며, 피부색이 비슷하여 2세를 낳아도 표시가 잘 나지 않고, 출산 후에도 체형이 변화하지 않는다. 몽골 여성은 같은 우랄알타이어 족에 속하기 때문에 한국어 습득이 쉽고, 자녀 교육에 유리하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 내부의 위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낡은 위계 역시 재생산되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은 서구화되어 2세의 체질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다리가 짧은 아시아인에 비해 러시아 여성들은 다리가 길며 체형에 균형미가 있다. 필리핀 여성들 역시 국제와 시대에 2세들에게 서구화된 생활방식과 영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선전된다.
지구화 시대는 자본과 상품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자의에 의해서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끌려서든 이동할 수밖에 없는 이주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인구 위기론이 상상하는 한국 사회는 혈통으로 연결된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배타적인 공동체이다. 결국 인구 위기론을 통해 생산되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한민족이라는 공동체의 경계이며 제대로 된 한국의 시민은 누구인가 하는 사회적 규범인 것이다. 이것이 저출산 담론에 대한 대응을 세부적인 대채에 대한 비판이나, 정책 제안에 국한시켜서는 안 되며, 인구 위기를 통해 한국과 주변 이웃, 나와 남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 지까지를 성찰해봐야 하는 이유이다.
작성자: 모래
‘출산율 저하’라고 한다. 언론과 정부는 여성들에게 아이 좀 낳으라며 난리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시대에 태어난 20대들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제발 좀 낳아달라는 구호 속에서 출산을 고민 해야 할 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공익적이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 되고 있다. 물론 젊은 여자들의 이기심 덕에, 돈 없는 남자들이나 농촌 남자들은 결혼도 못하고, 국개의 미래마저 흔들리게 되었다는 소리 또한 여전히 들린다. 그러나 더 이상 여성들을 탓하고 나무래서 출산/양육을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기에, 이제 그런 소리들이 대안 없는 무력한 뒷다마라는 것은 명백해졌다.
출산의 의무가 위대한 것이 되어가는 만큼, 출산의 담당자로써 여성의 권리 역시 주목받고 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가능한 대상과 기간은 확장되었고, 육아휴직 사용에 대한 불이익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 육아휴직 기간은 경력에도 가산된다. 아직 강제성과 실효성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뒤늦긴 했지만,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지난 7월 입법예고된 민법개정안은 여성들의 임금노동 참가 여부를 불문하고, 부부 각자의 재산을 공동재산으로 간주한다. 여성가족부 예산 역시 여성부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규무로 높아졌다(물론 대부분은 보육에 들어간 예산이지만 말이다). 이제 여성의 권리가 출산과 양육의 권리로 해석되는 범위 안에서, 여성의 권리를 더 이상 부정해서는 사회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새로운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여성친화적인 것이 가족친화적인 것을 가리키는 한, 그 여성친화성은 점차 사회적 동의를 얻어가고 있고 주목받아간다. 사실 여성친화적 정책은 사실 정상가족군 안에 들어있능 여성과 남성을 위한 가족정책이다. 여기서 말해지는 ‘여성의 권리’는 사실 가족 내에서 여성으로서의 성역할을 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여성가족부를 비롯, 각종 여성 정책은 출산율 저하 ‘담론’과 더불어 빠른 속도로 가족 중심적으로 돌아서고 있다. ‘여성’의 이름으로 친가족적 정책들이 기획하면서, 각종 정부 캠페인을 비롯 국가 산하 연구소와 관련 기관들은 여성과 가족을 주저없이 짝지으며, 그 안에서 여성을 위한 것은 곧 가족을 위한 것이 된다. 이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지만, 그 여성의 목소리는 결혼해서 출산과 양육을 책임지는 여성의 목소리로 제한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정상적이고 평균적인 핵가족, 표준적인 세대 재생산을 담당할 만한 가족 밖의 여성들의 권리는 이 안에서 소외되고 있다. 민법 개정안은 전형적인 남성 생계부양자와 여성 전업주부(내지는 아내보다 수입이 높은 남편)를 전제할 때만 여성을 위한 것이 될 뿐이다. 오히려 남성들이 수입이 적거나 없고 여성들이 생계부양자 역할을 하고 있는 가족들에게는, 이번 민법 개정안은 남성을 위한 것이 된다. 또한 아이를 둔 부부에 대한 세제 혜택이 높아지면서, 기존의 1인, 2인 가구에 대한 세제 혜택은 사라질 예정이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적 변화는 보다 개인적이고 다양한 삶의 모델을 가져왔다. 그러나 근래 정책과 법은 이성애 핵가족 모델에게 경제적/문화적 특권을 더 실어서, 현 사회를 다시 가족중심적으로 재편하는 방향으로 현 시점을 타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구적으로 여전히 7초에 한명의 어린이가 영약부족과 이와 관련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환경 문제, 청년 실업, 교육문제는 날로 심각해지는 이 마당에, 현재 출산율 저하는 인류를 위해서나 지구를 위해서나, 단순한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필수불가결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출산율 저하 현상이 문제되는 것은 국가 경계 안에서 기존의 한국 사회가 재생산되기 위한 조건의 재생산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최근의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 없이 한국 사회의 재생산이 불가능한 지점에 와서야, 우리 사회는 뒤늦게 그 역할을 이행하려 하고 있다. 여기에는 지금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짐을 덜어준다는 점에서 분명 여성친화적이고 여성주의적인 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미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가족 재생산을 목적으로 여성정책과 예산이 채워진다면, 여성들을 더 가족 안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고 이미 우리 앞에 와있는 새로운 질서들을 적극적으로 직면해서, 그 안에서 가능성들을 만들어 낼 시점 아닌가. 과거의 대안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이야말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새로운 꿈을 꾸기에 가장 좋은 때일 테니까 말이다.
작성자: 콩
해당 글은 아카이브 자료 공유 동의를 기다리는 있는 글로, 작성자의 허락을 구한 뒤 공개될 예정입니다.
혹시 언니네트워크의 연락을 받지 못하셨다면 unni@unninetwork.net 으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성자: 리파리
지난 9월 7일 열린우리당 이오경숙 의원의 대표발의로 여당의원 20명이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오경숙 의원은 ‘한국의 대표적 여성운동 단체’라고 스스로 소개하는 한국여성단체 대표 출신이며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현재 국회의원직을 맡게 된 사람이다. 또한 제도 정치권에서 이른바 ‘주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며 여성주의적인 정책을 실현해나가리라 기대되었던 활동가인데 그런 그가 제출한 이 법안, 뭐가 어떻길래 이렇게 소란스러운 걸까?
이 법은 ‘부부연령의 합계에서 자녀연령의 합계를 차감한 값을 가족연령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부부나이-자녀연령의 계산에서 부부의 나이가 어릴수록, 자녀가 많을수록 더욱 많은 지원을 받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오경숙의원 측은, “생활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누구나 기록에 상관없이 완주만 하면 완주메달을 주지만 프로마라톤 대회에는 기록에 따라 순위를 매겨서 1, 2, 3 등에게 금, 은, 동메달을 각각 주고 세계기록을 경신하면 스폰서가 보너스도 몇 천만원을 준다”며 “두 가지 경기형태가 다르듯이 가족연령제를 소개할 때 ~할수록, ~더 많이 라고 하여 프로마라톤 대회인 것처럼 소개하면 곤란하다”고 하였다.
[table “” not found /]
그러나 표에서와 같이 지원가능한 가족연령을 60세로, 한 명의 자녀를 둔 경우를 가정해보자. 이 때 부부나이가 각각 30세인 A가족은 2년 동안만 지원받지만 부부나이가 각각 25세인 B가족은 12년 동안 지원받을 수 있다. 이런데도 가족연령제가 생활마라톤의 경기형태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루하지 그지없는 일이다. 가히, “일찍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낳아라”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가족연령제에 대해 “돈 많은 부모 많나 일찍 결혼할 수 있는 이들에게 돈을 더 준다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한 네티즌의 말은 충분히 가능한 비판으로 보인다.
가족연령제의 핵심은 그러니까, 나이인 것이다. “이 나이엔 이 정도는 해줘야 돼”라는 나이에 대한 강박이 그 어느 사회보다 강한 한국사회이니만큼 나이에 따라 지원금이 왔다, 갔다 하는 법안이 나온 것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재수를 한다면? 유학을 간다든지 여행을 가고 싶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상상이 모두 나이에 걸리게 되지 않을까?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의 경우는 어떨까? 나이 자체가 돈이 되고 그에 따라 자원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대로 족쇄가 되어 입닥치고 한국사회가 허용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법안의 주요내용을 ‘저출산 대책으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경제적 지원대상을 임신 단계부터 실시하도록 한 것을 결혼 단계부터 지원하고, 가족연령 개념을 도입하여 가족연령이 낮은 우대가족 및 준우대가족에게는 취업지원, 주거지원, 세제혜택 등의 지원시책을 강구하도록 함’ 이라고 밝히며 인구 통계학적으로 저학력일수록 더욱 일찍 결혼하여 자녀를 낳지만 세 자녀를 두는 경우는 드물기 대문에 기존의 세 자녀 지원책에서 소외되는 젊은 부부들을 지원해주는 법안이라며 ‘현실적으로 이미 결혼한 어려운 젊은 부부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부부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이라면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법에서 말하고 있는 가족은 무엇을 말하나? ‘가족이가 함은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쇠희 기본단위를 말한다’라고 하며 기존의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혼, 사별, 입양 등으로 인한 가족구성의 변화가 있는 경우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방법으로 산정한 값을 가족연령으로 한다’고 되어 있어 ‘정상가족’에는 명시되어 있는 가족연령 계산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이 법안 발표 이후 논란이 일고 난 이후에야 ‘자녀수 기준만으로는 한부모가족, 미혼모, 입양가족 등의 경우에 소외될 수밖에 없다’라면서 기본법안에 없었던 이들 가족들에 대한 계산법을 마련하였다.
가족연령제가 ‘국가를 위한 출산율 높이기’를 위한 법안이라기보다 경제젹으로 어려운 젊은 부부나 한부모가족, 비혼모, 부가족, 입양가족을 위한 법안이라면 가족에 대한 개념 설정부터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가족연령제가 담고 있는 ‘정상’가족으로부터 ‘다양한’가족으로 법의 지원 대상을 확장시켜 나가는 방식은 곤란하다. ‘정상’인 가족에서 ‘다양한’가족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란 형태는 원래 다양했다. 원래 다양했던 가족의 형태 중에 하나만을 ‘정상’으로 기준 삼아 그를 중심으로 사회를 유지시키는 돌봄의 가치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지원의 중점을 ‘가족’과 그 안에서의 ‘생산’에 둘 것이 아니라 사회의 돌봄의 가치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가족연령제 안에서 읽으로 수 있는 것은 나이에 대한 강박과 정상가족이데올로기 뿐이었다. 하지만 출산과 양육의 의미가 국가의 유지 존속을 위한 재생산에 있지 않고 사회 유지를 위한 돌봄의 가치에 있다고 이해했을 때 나이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박 없는 법안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작성자: 늘
해당 글은 아카이브 자료 공유 동의를 기다리는 있는 글로, 작성자의 허락을 구한 뒤 공개될 예정입니다.
혹시 언니네트워크의 연락을 받지 못하셨다면 unni@unninetwork.net 으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