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수민
자기방어 첫 수업을 들은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조금 묘했다. 약간의 씩씩함, 약간의 용기. 두 번째 수업을 기다리며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자기방어 수업을 들어보았어”라고 말해보았다. 누군가는 큰 관심을 보였고, 누군가는 ‘그런다고 어떻게 이기냐’는 회의감을 표현 했고, 누군가는 ‘이런 것도 있다’라면서 호신술을 알려주었다. 유용한 방법이라면서 자기가 아는 호신술을 가르쳐 준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가 안면을 공격하라는 조언을 했다. 공격자의 눈을 찌르거나, 인중을 치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조언을 해준 이들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여 자신의 기술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조언은 나에겐 별로 유용해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여성 중에서도 키가 작은 편이다. 키가 170cm가 넘어가는 사람의 얼굴에는 손이 쉽게 닿지 않는다. 그런데 응급상황에 상대의 얼굴을 가격할 수 있을까? 게다가 도망을 쳐야할 상황에 몸을 더 가까이 접근하여 가격을 하라고? 이 조언들은 여성의 신체적 특성, 문화적으로 학습된 행동 양식, 그리고 심리적 두려움 등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래서 준비한 여성주의 자기방어의 내용을 좀더 쉽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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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로젝트의 계기가 된 책, 『미녀, 야수에 맞서다』
이 책은 작가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자기방어 수업을 듣기로 결심하게 된 과정과 다른 여성들과 함께 자기방어 수업을 들은 경험을 다루고 있다. 자기방어와 관련하여 미국의 자기방어훈련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를 알 수 있는데, 자기방어 수업을 통해 자신을 힘들게 하던 기억을 극복하고, 무기력을 떨쳐내는 여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책에는 ‘비명과 고함은 다르다. 힘 있는 고함을 질러라’ 라는 대목이 나온다. 작가가 경험한 자기방어 수업은 여성들이 함께 모여 힘차게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격한 공감과 함께 “고함은커녕 비명이라도 나오면 다행일거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사람이 너무 놀라고 당황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나 혼자 다른 시공간에 떨어져 나온 것 같고, 성대가 사라져버린 듯 목소리는커녕 숨소리도 나오지 않게 된다. 나는 이미 몇 번이나 그런 적이 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내가 쫄보여서만은 아니다. 여성들이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힘 있는 고함을 지를 일이 얼마나 있을까? 따로 무술을 배운 적이 없던 나는 그 어떤 곳에서도 기합이든, 고함이든 지를 일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소리를 지르고 몸을 쓸 일도 물론 없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학습의 결과이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내지르는 고함 소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함도 질러 본 사람이 지를 줄 아는 것이고,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눈을 똑바로 맞추며 “하지마”, “싫다잖아” 등의 메시지를 단호하게 소리를 내어 표출하는 연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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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자기방어 전문가들의 칼럼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통해 여성들이 싸우는 대상은 물리적 가해자뿐만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것에서 움츠러들게 하는 모든 것들이 싸움의 대상이다. 자기방어훈련 첫 수업 때, 선생님은 몸을 움직이는 법이 아니라 여성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무엇이든 하여 위기에서 빠져나오는데, 언론에서는 여성들의 이러한 노력을 조명하는 대신 이들을 범죄의 피해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크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자기방어수업은 이처럼 익숙해진 인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자기방어의 심리적,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통로는 자기방어전문가들의 칼럼이다. 일다에서는 최하란의 『노우먼 노크라이』를 연재하고 있다. 칼럼에서는 자기방어와 더불어 몸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문화에 관해서도 다룬다. 자기방어훈련의 예시영상이 함께 있는 경우도 있다. 아하한겨레에서 연재하는 문미정의 『문샘과 함께 ‘자기방어’』 는 청소년과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칼럼이다. 점점 위험해지는 사회에서 아이를 보호하는 것에 대한 내용처럼 어른과 아이의 관계에서 필요한 내용도 함께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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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아이 캔 디펜스>
여성주의 자기방어의 지상과제는 여성 자신의 안전함을 확보하는 것으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이기거나, 격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경계를 확인하고, 경계 안으로 상대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침입한 상대를 피해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2017년 페디아 팀에서 제작한 단편영화 <아이 캔 디펜스> 에는 안전확보를 위해 움직이는 자기훈련 과정의 모습이 잘 나와 있다. 주인공은 손을 올려 “하지마”라고 단호히 말하며 거리를 벌리고, 상대방을 피해 재빨리 안전지대로 뛰어간다. 이 과정에는 심리적 대처와 육체적 대처 모두가 중요하다. 여성들은 개인적, 집단적 경험을 통해 폭력적 상황의 전조를 알아채는 능력을 체화하고 있다. 바로 그 불안감, 바로 그 쎄한 느낌. 자기방어훈련 전문가들은 자신의 직감을 따르라고 조언한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만 돌아보기 무서워서, 뭐라고 확인해야 할지 몰라서, 나를 이상한 여자 취급할까봐 내 직감이 보내는 알람을 무시하여 불안감을 키울 필요가 없다. 나의 경계범위를 확실히 하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는 과정을 통해 보다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침착하게 의사를 표현하고, 팔을 앞으로 뻗어 공간을 확보하고, 주변 사람들이 상황을 인지할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자.
단편영화 <아이 캔 디펜스>
주짓수를 바탕으로 한 자기방어훈련 과정이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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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별 매뉴얼을 소개하고 있는 책,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은 현직 형사가 쓴 책이다. 택시, 택배, 주차장, 클럽, 스토킹, 데이트 폭력 등 다양한 상황에서의 대처법이 망라되어 있다. 여성가구 대상 홈안심서비스, 안전귀가서비스 같은 각종 서비스에 대한 소개 같이 한국의 상황, 실정에 맞는 정보들이 많다. 칼럼보다 길고, 무엇보다 작가가 십수 년 동안 여성범죄를 전담해 온 현직 형사이기 때문에 디테일한 사례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사례를 분석하며,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변을 주는 구성이 흥미롭고(뉴스 볼 때마다 머릿속에서 해보는 그거), 또한 이 과정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짚어주는 것이 유용하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정당방어의 인정 범위가 굉장히 엄격하며, 실제로 과잉방어로 법적 제재를 받는 경우들도 꽤나 많다. 시각 정보도 많기 때문에 책이 눈에 잘 들어온다는 것도 장점이다.
다른 책에서 접하기 어려운 풍부한 정보가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인 것은 확실하지만, 이 책을 여성주의 자기방어 책이라고 분류하는 이유는 작가의 경험담에 있다. 어릴 적 겪었던 강제 추행의 축축한 기억, 대학생 때 겪었던 데이트 폭력, 경찰로 일하며 겪은 경험들은 정보의 유용함을 넘어서는 힘을 갖고 있다. 작가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추행을 발견하고는, 목격자로서 힘을 실어주기 위해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무력감과 분노를 함께 느꼈던 일이 떠올랐다. 자기방어에 대한 안내서들에는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안전하게 상황에 개입하는 사례나 방법이 포함된다. 내가 느꼈던 무력감을 극복하고, 다른 여성들이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기방어 수업을 듣고, 책을 읽는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연습과, 그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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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공감 가는 수업후기가 있을까? 웹툰 『어쿠스틱 라이프』
‘독고다이’ 프로젝트의 스타트로 자기방어수업을 계획하고, 첫 수업을 앞두고 설레어 하던 때에 마침 애정하고 애정하는 『어쿠스틱 라이프』에 난다 작가의 자기방어수업 후기가 올라왔다. 2018년 7월 6일과 13일에 올라온 ‘평하를 원하거든–상,하’ 편이다. 내용 중간중간에 자기방어 훈련과정도 잘 설명되어 있고,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느껴지는 근자감과 같이 괜시리 함께 웃게 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화재대피 훈련을 반복하듯 극도의 공포와 혼란앞에서 패닉에 빠져 나쁜 판단을 하지 않도록, 일종의 비상탈출 매뉴얼을 내 몸에 숙달시키는 것이 연습을 통해 신체반응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작가의 말보다 더 자기방어훈련의 이유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 본 연재는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스페이스살림 프로젝트 사___이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