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꼴 코너는 매달 꼴키퍼들이 계절에 맞는 문화 컨텐츠를 소개하는 책방꼴의 연재글입니다.
– by 선
퍼뜩, 서슬퍼런, 펑!
목뒤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달았다. 약속 장소로 가려면 지하철역으로 가야 하는데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반대 방향인 버스정류장으로 가고 있었다. 출근길이 더 익숙한 발의 선택이었다.
최근, 모든 신경이 손끝, 발끝, 혀끝, 엉덩이, 정수리 같이 몸의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타자를 치다가, 스마트폰 화면을 쳐다보다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하다가 중도에 멈춰서 내가 한 행동을 되감아 보아야 비로소 내가 한 것들을 의식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채 점점 감각은 무뎌지고, 생각들은 쇼츠 영상처럼 단편적으로 보인다.
잘못 들어선 길에서 찬바람에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스산한 가을 풍경을 보았고, 나에게 발생한 오류가 빚어내는 두려움을 느꼈고, 잠깐의 어지러움을 겪었다. 본래 나에게 있었지만, 다시 찾아온 경험은 생경하게 다가왔다. 분절되었던 감각과 감정 그리고 생각이 다시 이어지는 그 순간은 자극적이었다. 책의 계절, 가을에 마음의 양식을 쌓으라고 했던가. 나는 마음을 살찌우는 것보다 무뎌진 나를 벼리어줄 서슬 퍼런 표현을 읽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소개하고 싶은 소설들의 문체가 모두 날이 서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읽은 세 소설은 현실에서는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인간의 삶을 포 뜨듯이 얇게 저며서 한겹 한겹 들여다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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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의 사건에 무더기로 얽히어 관계를 맺는다. 당황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같은 사건에 저마다 다른 반응들을 보이지만,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스며든 무언가가 있다. 사고, 질병, 참사 등의 ‘사건’으로 안면도 없이 맺어지는 우리의 관계는 어떨까.
한강, 『희랍어 시간』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p.14)
이처럼 자신의 순간을 공들여서 주목해볼 수 있을까? 비록 소모적일지라도 내가 느낀 감정을 분명하게 써보고 싶어진다.
벨마 윌리스, 『두 늙은 여자』
죽음에 가까운 시련 앞에서 다시 한번 성장하는 두 노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가 가진 힘에 주목해 본다. 세월이 흘러도 우리의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잊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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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따라 하늘은 높아지고, 나뭇잎은 우수수 떨어졌다. 여백이 생긴 풍경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에 내가 펑! 하고 사라진 느낌이 들 때, 그런 나를 채워줄 책을 읽는 것은 월동 준비의 일환이기도 하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기 쉬운 겨울이 오기 전에 언니들도 월동을 위한 책을 준비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