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꼴 코너는 매달 꼴키퍼들이 계절에 맞는 문화 컨텐츠를 소개하는 책방꼴의 연재글입니다.
by 뽑
출판업계에 왜 이렇게 퀴어가 많은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작은 대화 끝의 결론은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기 때문이다(강유원, <책과 세계>, 7쪽.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에서 재인용). 맞는 말이다. 아니, 퀴어가 병이라는 뜻은 아니고. 자기 세계와 융합하지 못한 자들이 주로 책을 읽는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중)은 사람들.
예전과 비교하면 남의 말을 게울 때까지 먹어 치우는 갈급증은 많이 사라졌다. 이제 나는 어느 정도 자아가 형성되었다고 점잔을 빼고 있다. 우아하게 한 부분씩, 필요한 내용과 아름다운 부분만을 발췌해 고상하게 남의 이야기를 썰어 먹는다. 멀쩡한 사자인 척하면서 얼룩말의 엉덩이를 깨문다. 그리고 현타가 온다, 남의 엉덩이를 입 안에 넣은 채로.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이다. 과장을 보태, 세상이 나빠지는 것은 사람들이 책을 안 읽어서다. 지금 여기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책에 몰두하지 않는다. 불만족한 사람들이 (자주) 책을 읽고 (가끔) 세상을 바꾼다.
요새 활자가 눈에서 튕겨 나가는 순간을 자주 느낀다. 눈이 줄글을 따라간다. 뇌까지 글자가 들어오지 않는다. 애써 읽어보려고 하지만 금방 책과 나는 분리된다. 하는 수 없이 어영부영 넘기면서 책 내용을 파악한다. 필요한 문구나 내용이 뽑혔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이 현상은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요한 하리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집중력이 최악을 향해 치닫기 때문일까, 혹은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이나다 도요시가 말했듯 “작품이 콘텐츠가 되고 감상이 소비가 되”면서부터일까. 어쩌면, 이제 나는 병들지 않았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는 걸까.
어느 이유이든 책에 푹 파묻혀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시공간이 이동한 경험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슬픈 일이다. 나의 크나큰 위로와 절망인 읽기가 나를 떠났을지 모른다니. 책방꼴이 가끔 열려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 시간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정해져 있다. 책장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은 밥벌이 장소에 매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반짝임이 나에게 허용된다면, 이 공간이 그것을 줄 수 있다면. 나는 병들고 행복한 사자가 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