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작성 : 나기
페미니스트로서, ‘가사’와 ‘돌봄’에 대한 책무로부터 발버둥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훌륭한 사회인이자 동시에 훌륭한 가사노동자로서 자라기를 기대받으며 자라온 세월 속에서 ‘딸’이라는 위치는 ‘어머니’가 없을 때 언제나 나머지 가족구성원을 위해 집안을 유지하고 식사를 차리고 가족을 돌봐야 하는 위치였다. 아버지가 귀가했을 때 겉옷을 받아드는 일부터, 무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오빠가 밥을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확인해서 밥을 차려주는 일, 훗날의 남편을 위해 남편이 초대할 손님들에게 내놓을 주전부리 준비를 연습하는 일 등등을 요구받았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챙길 능력을 수행하는 과정으로 여기며 순응하기도 했고 그보다 자주 방문과 밥상에 분노를 표출하며 부모님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나는 자주 “머리는 페미니스트지만 몸은 노예로 길들여진”이라는 표현을 썼다. 누구보다 남의 필요를 쉽게 알아채고 그 필요를 채우는 일을 ‘해내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워줄 때 성취감을 느끼는 심리적 보상체계를 체화한 상황에서 나는 자발적 돌봄제공자였다. 이러한 특성은 남성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자주 내 정신상태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내가 하는 모든 자발적 돌봄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돌봄이 아니라 여성의 ‘자연스러운’ 특징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성차별적이기도 했지만, 나는 내가 돌봄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해 내 젠더 정체성이 끊임없이 ‘여성’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심리적 고통을 느꼈다.
그렇다면 여성성소수자와의 파트너십에서는 해방되었는가? 더이상 내 돌봄이 ‘여성’으로서의 젠더수행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크나큰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점에 도달할 리 없다. 인간 대 인간의 돌봄이라는 프레임에서도 수많은 문제가 발견되었다. ‘어떤’ 가사와 돌봄을 ‘노동’으로 인식하고 행하는가의 차이과 각자가 능숙한 가사와 돌봄의 차이는 나와 다른 사람과 살 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차이였다. 그리고 그 차이가 상대에 대한 애정으로 치환될 때 가사와 돌봄에 있어서의 불균형은 파트너십의 감정적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야기를 헤테로 기혼자 친구들과 나누다보면 백이면 백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애초에 바라질 않아”와 “여자끼리도 그런 거 가지고 갈등이 있니?”
지난 5월 진행된 <사랑과 전쟁 : 가사노동과 정서적 돌봄>은 젠더역학이 아니더라도 가사와 정서에 대한 정의, 돌봄을 덩어리가 아닌 세세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정도, 돌봄에 대한 주의력과 사랑이 강력하게 붙어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가사노동과 정서적 돌봄에 대한 협상이 자기 삶의 통제감과 강력하게 붙어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등의 차이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이었다.
이번 모임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던 <페어플레이 프로젝트> 는 돌봄분담에서의 갈등을 해소하는 첫번째 단추로 자신이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종류의 돌봄을 써내려가고 카드로 ‘물리적 실체’가 보이도록 만드는 것을 제시한다. 이 책은 이성애부부 사이의 돌봄 분담의 불균형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많은 참조점을 준다. 사랑과 전쟁은 이 책의 도움을 받아 그 중 일부만을 차용하여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내가 혼자 산다면 00을/를 00마다 00번 할 것이다
청소기돌리기
걸레질
싱크대등하수구청소
화장실청소
냉장고재고파악
장보기
요리
옷정리
빨래
이불빨래
설거지
분리수거
아래의 다양한 정서적 돌봄 키워드를 보고 자신이 하거나 받는 내용에 대해 적어보세요
선물
낭만적표현
휴일
있어주기
참여하기
들어주기(일상,기쁨,슬픔)
위로와
지지
격렬한환대
참가자들은 내가 ‘가사’나 ‘돌봄’이라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키워드가 적혀있는 것에 놀라기도 했고, 타인과 같이 살기 때문에 늘어난 부담도 있지만 타인 덕분에 자기자신에 대한 돌봄도 향상되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좁은 집, 우리의 바쁜 삶과 피로도 사이에서 가사분담을 조절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때로는 정말 손쉽게 옷을 걸 수 있는 옷걸이나 식기세척기 등 하드웨어적 도움과 가사도움과 같은 소프트웨어적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가사 분담을 조율하면서 내 통제감이 훼손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눴다. 설거지를 할 타이밍, 냉장고를 치워야 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의 차이, 타인의 무질서함(그 사람 입장에서는 유지되고 있는 질서)을 어느 정도 참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와 내가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높은 수준의 가사/돌봄과 내가 할 수 있는 가사/돌봄의 수준 차이를 견디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와 많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정서적 돌봄에서는 파트너가 멋대로 쥐어주는 위로가 아니라 나에게 정말 ‘의미있는’ 정서적 돌봄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달아가기도 했고, 상대와의 차이를 조율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참가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모임이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정말 내가 문제인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 어려웠는데 가사노동과 돌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후기를 남겨주었다. 모임에서 준비한 질문지로 파트너와 이야기를 더 나누어보았다는 후기도 🙂
같이 사는 삶은 피곤하다. 맞춰나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 포기를 전제한다. 피로와 포기를 견뎌가며 ‘애정’의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랑과 전쟁은 그 쉽지 않은 길을 계속 걷고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며- 같이 걷기를 제안한다. 다음 모임에도 또 좋은 응원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두번째 모임 후기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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