쩡 (사랑과전쟁 기획단)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내 여덟번째 서울집이다. 고시원이었던 첫번째 집을 제외한 다른 일곱개의 집에서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 살았다. 보통 하우스 메이트는 애인들이었고, 가끔은 친구들이었다. 지난 세월 하우스 메이트들과 숱하게 다퉈온 경험덕분인지 지금 애인과 하고 있는 동거는 좀 순조로운 것 같다. 뭐든지 반복해서 여러 번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 있던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거의 전문가가 된걸까?
N명의 사람이 있으면 N개의 청결 기준이 있다. 이 다양성과 차이가 바로 갈등의 근원이다. 단순히 깔끔함과 지저분함으로 딱 나눠지지 않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청결의 세계. 아침에 나갈 때 왁스를 잔뜩 바르고 나갔지만 저녁쯤 돌아와서 머리를 감지 않고 잠드는 애인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도 못 견디는 사람인데, 그건 괜찮다니. 매일 아침 일어나면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내 눈에는 도저히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돌돌이로 집요하게 청소하는 내 애인은 쓰고 난 물티슈 뚜껑이 열려 있는 것은 또 아무렇지 않다. 나는 집안 곳곳에서 열려진 뚜껑을 볼 때마다 야무지게 딸깍 잠그면서 되게 신기해했다. 저마다 추구하는 깨끗함과 못 견디는 더러움이 다르고, 집에 쏟는 애정과 노동력이 다를 때 우리는 어떻게 이 차이를 안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이 차이를 안으면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까.
지금 우리 집이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는 이유 몇 가지를 생각해봤다. 두 개가 떠올랐다. 하나는 생색의 일상화다. 이게 지난 동거 가족들과의 차이이기도 한데, 같이 사는 사람에게 나의 노동을 알리는 것이다. 의식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노동을 사라지게 하는데 굉장히 효과적이다. 보상 없는 노동은 누구에게나 부당하다는 감각을 안겨준다. 공용 공간에 들인 노력은 나 혼자 알고 있으면 억울하다. 아무로 모르는(그래서 몰라주는) 노동을 과연 누가 지속할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인정 욕구 하나만큼은 반드시 채워줘야 한다. 노동을 한 사람은 생색을 내고, 상대방은 고마워하면 된다. 되게 간단한 방식의 보상이지만 꽤 효과가 좋다. 고마움이라는 정서적 에너지를 빼면 시간, 돈, 체력 아무것도 안 든다. 가족의 화목이 쉽게 얻어진다.
또 하나는 집안일에 관한 한, “대체, 왜?” 를 사전에서 지우는 거다. “대체 왜 옷을 벗어서 빨래통에 넣을 때 뒤집어서 넣는거야?” “대체 왜 설거지하고 나서 싱크대에 튄 물을 안 닦는거야?” “대체 왜 샤워하고 나서 머리카락을 안 줍는거야?” 가사노동에 대한 사랑과 전쟁 모임에서 가장 유용했던 것은 이 지점이다. 무궁무진한 집안일의 스펙트럼 가운데 내가 인지하는 것과 상대가 인지하는 것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알았다. 내가 혼자 산다면 ~~을 ~~마다 ~~번 할 것이다. 그래, 우리는 혼자 살면 그 모든 차이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을 내가 원하는 빈도로 하면 된다. 같이 살 기 위해서는 몰이해를 경계해야 한다.인간은 몰이해와 부딪혔을 때 가장 좌절하는 종이라 그렇다. 이해하기보다 이해하지 않기(대체 왜 그래???)가 더 쉽지만, 별 수 없다. 그래야 같이 살아진다.
그렇지만 생색을 일상화하고, 몰이해를 쫓아낸다고 해도 갈등을 멈출 수는 없다. 말이나 글이라 쉽지, 같이 사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갈등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다른 갈등이 찾아온다. “같이 못살겠다” 싶은 순간도 얼마나 많은지. 일주일에 여섯번 동거인 때문에 즐거워도 딱 하루 성질나면, 그 하루에 차라리 혼자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그래도 내가 동거를 선택하는 것은, 내가 혼자보다 함께 있을 때 더 잘 살아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타인이 곁에 있을 때 나는 지지를 받고, 활력을 얻는다. 친절한 타인이 주는 긴장감은 내가 무기력에 짓눌리지 않게 도와준다. 혼자 살 때보다 더 많이 웃는다. 요리도 훨씬 더 많이 해먹게 된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이 하루의 가장 큰 위안일 때도 많다. 무엇보다 주거비가 상당히 절약된다. 그래서 나는 지지고 볶아도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왕이면 지지고 볶는 날보다 웃고 재밌는 날이 더 많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아지는지 고민한다. 나랑 같은 고민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니 좋다. 계속 같이 얘기해야지.